“붉은 신호 앞에선 멈춰라”
이헌조(전 LG전자 회장)
‘철학에 기초한 경영, 기본에 충실한 경영’. 지난 6월 24일 오전 7시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2층 에메랄드룸에서 있었던 인간개발연구원 조찬강연은 그 주제부터가 남달랐다. 이날의 연사는 LG그룹 창사이래 가장 성공한 전문경영인으로 평가되는 이헌조 전 LG전자 회장이었다.
이 전 회장은 1976년 LG증권 사장에 취임한 이후 1998년 정년 퇴임할 때까지 럭키금성 기획조정실, 금성반도체, LG상사, LG전자에서 잇따라 CEO를 역임했다. ‘정도경영’과 ‘인간 기술 그리고 미래’ 등 그 동안 LG그룹이 표방했던 경영철학을 주도적으로 입안하고 실천하기도 했던 그는 입사 초기의 ‘고난의 행군’을 회고하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고 물으면 나는 주저 없이 ‘함흥냉면’이라고 답한다. 경남 의령 출신인 내가 맵고 짠 북쪽 음식을 좋아하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1957년 럭키화학에 입사한 뒤 2년 만에 판매과장이 된 나는 국산 라디오와 선풍기는 물론이고 훌라후프 등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전파상이 운집한 시장을 뛰어다녀야 했다. 대부분 북한에서 월남한 전파상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니 어느새 함흥냉면을 좋아하게 됐다.”
비록 ‘장사꾼’을 자처한 그였지만 인생에 대한 고뇌마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이 ‘사색의 청년’은 4·19와 5·16 등 역사의 격랑을 거치며 한때 좌절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 근본적으로 ‘발상의 전환’을 촉구한 것은 ‘모리배의 앞잡이'(5·16 직후 재벌을 ‘모리배’라고 불렀다고 한다)라는 자책감만은 아니었다. 빠르게 대응하지 못하면 뒤쳐지는 세상의 변화였다.
“LG의 전신인 럭키금성은 제조업이 중심이었다. 그러다 보니 ‘손에 잡히는 물건’을 파는 것이 내 업무의 전부이다시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되겠다는 자각이 들기 시작했다. 발바닥이 닳도록 뛰어다니며 실물 거래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시절에 금융산업이 발달하면서 신용에 입각한 선물 거래도 가능하다는 것을 지켜볼 때 역시 변화의 욕구를 느꼈다. 그러나 나에게 진정한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게 만든 것은 1997년 IMF 사태와 함께 왔던 인터넷 시대의 도래였다.”
CEO를 정점으로 한 기존의 수직적 피라미드 조직 형태에서 CEO와 사원이 직접 대화할 수 있는 수평적 네트워크 조직 형태로 전환하는 것을 목도하며 이제 더 이상 기존의 방식만을 고집해서는 안되겠다는 자각이 더욱 절실하게 들었다. ‘붉은 신호면 선다’와 ‘빈대를 잡기 위해서라면 초가삼간이라도 태운다’는 역발상의 경영철학을 주창하기 시작한 것은 필연적 귀결이었다.
“LG전자의 전신인 금성 시절에 회사가 발칵 뒤집힌 일이 있었다. 수출을 통해 먹고살던 상황에서 미국의 식품의약안전청(FDA)이 금성 TV의 수입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당시 미국은 인체에 해로운 전파가 일정한 허용치를 넘길 경우 전자제품의 판매를 금지하는 강력한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따라서 공장에서 제품을 조립하며 의무적으로 전파를 측정한 뒤 일일이 기록해야 했다. 더욱이 당시 FDA는 공장을 돌아다니며 철저하게 전파 측정 의무를 수행하는지 조사하고 있었다.”
당시 금성에서 만든 전자 제품의 유해 전파는 허용치를 넘기지 않았다. 문제는 전혀 예기치 않은 곳에서 발생했다. 전파를 측정하는 직원이 의무를 소홀히 했던 것이다. 물론 그 말단 직원은 처음에는 시키는 대로 정확하게 측정하고 기록했다. 그러나 아무리 측정을 해도 허용치를 넘기지 않자 자신의 의무를 제대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비록 그것이 하찮아 보이는 작은 규칙이라 하더라도 말단 직원이 그것을 지키지 않을 경우 아무리 거대한 회사라도 하루아침에 존폐의 위기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준 사례였다. 결국 공동체가 유지되고 발전하기 위해선 공동으로 약속한 규칙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때 기본이 바로 서고 신뢰가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호등에 붉은 불이 들어오면 자동차나 보행자가 없어도 일단 정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 것도 바로 이 사건을 겪고 나서부터였다.”
일부 독자들은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빈대를 잡기 위해서라면 초가삼간이라도 태운다’는 경영철학도 기본을 철저히 지키고, 시스템을 바꿔 효율을 높이자는 ‘역설의 논리’임은 물론이다. 이와 관련 그는 또 하나의 일화를 소개했다.
“전문경영인으로 있을 때 어느 생산 현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임금협상 과정에서 노동조합 대표가 작업 현장이 매우 열악한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특별수당을 지급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나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열악한 상황에서 일하고 있다면 그 열악한 상황 자체를 고쳐야지, 그것을 그대로 방치한 채 임금만 올려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비용이 들긴 했지만 작업 환경을 개선했고, 그때부터 노동자들이 경영자를 신뢰하기 시작했다.”
정도경영(正道經營). 이헌조 전 회장은 그것을 “이익을 추구하되 이익 그 이상(以上)의 가치를 추구하는 경영”이라고 설명했다. ‘이익 그 이상의 가치’, 즉 이상(理想)을 가진 기업에게 미래가 있다는 말이다.
정지환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