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을 가진 사람의 유리한 점을 말하라면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내 경우 어렵고 힘든 판단을 해야할 때 하나님과의 교감을 통해 처리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행복하고 자랑스럽다. 하나님은 항상 미약한 내 심령에 힘과 용기와 소망을 불어넣어 주셨다.
인간개발연구원은 군사정권 이후 시대 상황에 따라 많은 정치인과 관련을 맺었다. 3김씨를 비롯한 거물급에서부터 차세대 지도자감까지 숱한 정치인들이 연구원 모임에서 자신들의 정치 역정과 철학 등을 발표했다. 일부 정치인은 초청 여부를 놓고 논란이 있었지만 나는 신앙인의 양심에 따랐고 결과가 좋았다. 물론 총리와 장관급 인사들도 다수 참여했다.
그 중 6공 시절 노재봉 국무총리는 인간개발연구회에서 한 발언으로 자리에서 물러난 것같아 지금까지도 송구스럽다. 그는 당시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연구회에 나와 거리낌없이 각종 정치 현안에 대한 소견을 밝혔다. 그런데 그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인간개발연구원과 3김씨의 인연은 필연적이었던 것같다. 한국정치를 논할 때 이 세사람이 빠지면 ‘만두소 없는 만두’와 다를 바 없어 어떻게든 모임에 모시고자 했고 세 분은 기꺼이 참여해 진솔하게 심경을 밝혔다. 사실 3김씨로서도 발언 자리가 마땅치 않았던 시절이었다.
김대중씨의 경우 특히 우여곡절이 많았다. 오랫동안 해외에 체류하다 1988년 귀국한 그는 가슴속에 큼지막한 응어리를 안고 있었다. 당시 나는 KBS 라디오의 대담프로를 진행하는 중이었는데 연구회 초청에 앞서 그를 초대해 한국 정치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이어 정식으로 연구회 강사로 초청했는데 난관이 많았다.
당시 사회 분위기가 제법 자유로워지긴 했지만 그래도 정부 당국에선 그의 발언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정보기관에서 몇 차례나 취소하라는 전화가 오고 주위에서도 만류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김대중씨 초청 연구모임은 국내외 내로라 하는 유명인사 500여명이나 참석하는 성황을 이뤘다. 다행히 별 문제없이 참석자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유익한 모임으로 마무리됐다. 그는 연구회가 끝난 뒤 “나라 발전을 위해 경제인들과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이런 자리를 만들어 줘 고맙다”고 말했다.
김대중씨는 이후 평민당 총재 시절 두 차례나 나를 초청했지만 괜히 오해를 살 여지가 있다는 판단에서 정중히 거절했다. 이런 내 처지를 이해한 그도 “지극히 사적인 초청”이라며 “동교동 사택에서 아침이나 먹자”고 해 응했다.
김영삼씨의 경우 3당통합 후 민자당 대표로서 노태우 대통령과 미묘한 갈등을 겪고 있을 때 연구원의 제주도 하계세미나에 초대했다. 그는 세미나가 끝난 이후에도 호텔에서 참석자들과 밤을 새워 정국 현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특히 그는 특유의 스타일대로 거침없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 오히려 듣는 이들을 걱정스럽게 했다.
김영삼씨는 한참 후 대통령당선자 축하연에서 마주쳤을 때 무척 반가워했다. 그리고 그 역시 몇차례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으나 정중히 거절하고 다만 유종하 외교안보수석,김정남 사회문화수석 등과 만나 정치와 경제문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김종필씨는 1987년 10월 연구회에서 ‘한국정치의 어제,오늘 그리고 내일’이라는 제목으로 특유의 문학적 예술적 소양을 뽐내면서 열정적인 강연을 했다. 그런데 그날 그의 강연 테이프가 사라지는 ‘사건’이 터졌다. 강연장을 샅샅이 뒤졌지만 끝내 테이프를 찾지 못해 지금까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이후에도 거물급 정치인들이 가끔 연구회 강단에 섰다. 이종찬씨의 경우 국회의원 시절 약속을 지키기 위해 국가정보원장이 된 뒤 강사로 섰고 이명박씨는 ‘정주영 회장과 나’라는 제목의 감명깊은 강연을 했다. 또 차세대 지도자 육성이라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정동영 손학규씨 등이 강사로 나와 강연과 함께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정리=정수익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