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2월12일. 철권통치의 유신독재가 무너진 날, 온 세상은 충격속에 일시 마비된듯 했으나 인간개발연구원은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할 일을 충실히 했다. 서울의 중심부인 광화문에 자리한 코리아나호텔에서 서울대 사회과학대 박우희 교수를 강사로 초청, ‘미-이란의 중동사태가 빚은 국제경제질서의 혼미와 우리의 대책’을 주제로 연구회 모임을 가졌다. 만약 그 때 모임을 취소했다면 훗날 두고두고 후회했을 것이다.
이 사건과 함께 시작된 80년대는 70년대 후반부터 국내에 몰아쳤던 격랑의 소용돌이가 더욱 굽이쳤다. 군부정권과 이에 완강히 맞선 저항세력이 엮어내는 갈등의 파고는 영일이 없이 숨가쁘게 이어졌다. 격렬한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으로 온 사회가 매일같이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나는 차분히 연구원의 지경을 넓혀갔다. 기존의 ‘인간개발경영자연구회’에다 ‘전국경영자세미나’까지 열며 정부나 기업, 학교 등 어디에서도 할 수 없는 일을 알차게 추진했다. 덕분에 답십리 아파트를 벗어나 여의도에 조그마한 사무실을 얻었다.
정주영 김우중 최종현 구자경씨 등 대기업 회장들, 남덕우 신현확 이한빈 조순씨 등 부총리 출신들, 함석헌 서경보 김태길 김동리 정비석 이숭녕씨 등 종교·문화계 인사들이 연사로 초빙했고,이들은 기꺼이 강연과 토론에 참여했다. 국내 주요 대학의 총장들을 비롯한 유명 학자들의 경우 거의 모두 연구원을 거쳐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함께 80년대 들어선 ‘인간개발 토요시민강좌’와 같은 시민교육 프로그램도 실시했고 월간 ‘인간개발’, ‘정신세계 다이제스트’ 등 지식정보지도 만들었다. 또 일본종합연구소와 제휴한 유통산업 연수훈련, 일본 윤리연구소와 공동개최한 기업윤리경영프로그램 등 해외 유력기관과의 협력사업도 활발히 추진했다.
그 중 1987년 시작한 ‘전국경영자세미나’는 보람과 아쉬움을 동시에 남겼다. 봄과 가을, 일년에 두차례 연 이 세미나에는 우리나라 내로라하는 기업인들이 대부분 한번 이상 참여해 연구원과 인연을 맺었다.
특히 1회 세미나 때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강사로 나왔던 때는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직까지 맡고 있었던 정 회장을 초청하기는 대통령 모시기 만큼이나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내가 강사로 초청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자 정 회장은 뜻밖의 반색을 했다. 정 회장은 인간개발연구원에 대해서 많은 사전지식을 갖고 있었고 예전부터 연구원 모임에 참가하고 싶었다는 말도 전해왔다.
약속을 하고 광화문 현대빌딩으로 가 정 회장을 만났다. 그는 연구원 운영과 세미나에 대해 자세하고 따져 묻고는 “대중강연의 경험이 없어서…”라며 염려했다. 그래서 당시 모 신문사 편집국장인 최청림씨와의 대담 형식으로 ‘정주영의 기업경영’을 풀어나가기로 했다. 정 회장 외에도 500여명의 각계 지도층 인사들이 모인 가운데 진행된 첫 세미나는 그야말로 질과 양에서 대성공이었다.
이 세미나는 이후 그런대로 이어지다 1997년 IMF사태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20회를 끝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한참 후에 ‘밀레니엄 포럼’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계승했지만 중단된데 대한 아쉬움이 크다.
이처럼 80년대 들어서도 연구회와 세미나의 주제는 주로 경제와 경영 등이 주류를 이뤘다. 그러나 시대가 시대인 만큼 그 틀 안에서만 머무를 수는 없었다. 연구원 안팎에서 ‘시대의 지킴이’로서의 역할을 강조하며 정치 문제도 다뤄야 한다는 요청이 계속 나왔다.
어려운 판단을 할 때마다 도움을 준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래. 이 시대의 경제는 정치와 유리될 수가 없다. 이 또한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자”는 결심으로 그 동안 벽을 쌓아온 정치 문제를 주제로 삼았다. 자연 정치인과 정부 관계자들이 많이 참석할 수밖에 없고 중앙정보부의 감시망이 연구원 주변에 둘러쳐졌고 나는 요시찰인물로 찍혔다. 그 여파로 정부 요직 인물이 연구회에서 한 발언으로 자리에서 물러나는 일도 발생했고, 3김씨가 연구원과 인연을 맺게도 된다.
정리=정수익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