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개발연구원이 자리를 잡아가던 1970년대 후반부 내 인생에는 또 한번 요동이 일었다. 노사문제가 새로운 사회문제로 대두되던 시대상황에서 새로운 관점의 해결법을 제시,호평을 받는 중에 뜻밖의 범법자로 몰리는 수모를 당했다. 말 그대로 영욕이 교차했다.
당시는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한창 진행중이던 때로, ‘수출만이 살길이다’라는 슬로건 아래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 등으로 노동운동이 고개를 내밀 때였다. 여기저기서 노동조합이 결성됐고 이에 따라 억압과 감시가 심했다.
노사문제가 첨예화되자 정부에서도 해결책 찾기에 골몰했다. 그러나 별다른 묘책을 찾지 못하던 정부는 공업진흥청장 노동청장 등 책임자들을 경영자조찬회에 참석시켜 탐색까지 한 후 연구원이 나서주도록 했다.
그 때 내가 기획한 것이 ‘최고경영자를 위한 노사협조 세미나’였다. 경제 4단체 후원으로 시작된 세미나는 금세 선풍을 일으켰다. 정부 뿐만 아니라 기업인들에게도 노사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이 세미나는 26회까지 연장되며 참석자가 3100여 명에 이르렀다. 정부에서는 표창 계획을 알려주며 경영자 뿐만 아니라 노동실무자 등도 참여할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으로 확대해 재개하자는 뜻까지 전해왔다. 이러다 보니 세미나를 적자로 운영해왔지만 힘이 났다.
그런데 마른 하늘에 웬 날벼락이…. 내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죄인으로 몰렸다. 새로운 교육 프로그램 구상에 몰두하고 있던 어느 날 건장한 남자 몇명이 연구원으로 몰려와 주요서류들을 빼앗고선 다짜고짜 나를 끌고 갔다. 치안본부 특수수사대라고 자기들을 소개한 그들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다름아닌 내 집이었다.
그런데 내 집으로 들어선 순간 호기롭게 나를 끌고 간 그들의 표정이 돌변했다. “이곳이 정말 장 원장 집 맞소?”를 몇번이나 되풀이해 물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제법 으리으리할 줄 알았는데 초라하기 짝이 없으니 의아할 수밖에. 어쨌든 나는 난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택수색이라는 것을 당해 봤다.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든 그들은 다시 나를 데리고 청와대 옆의 어떤 건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선 총무부장 등 연구원의 몇몇 직원들까지 붙들고 가 며칠간 심문을 벌였다. 감출 게 없었던 우리는 있는 그대로 다 말해 줬다. 우리 옆에는 안면있는 노동경제학자들 몇명도 조사받고 있었다.
뒤에 알았지만 당시 그들은 이 정도 큰 규모의 전국 순회 세미나를 하면 뭔가 ‘콩고물’이 있을 거라는 추측으로 우리를 잡아 다그쳤다. 거기다 ‘서정쇄신’ 바람이 한창 불었던 때라 수사대는 노동청 고위인사들의 뒤를 캐다 인간개발연구원에 대한 표창 상신까지 돼 있는 걸 보고 ‘뒷 거래’의 심증을 굳힌 것이다.
아무리 조사해도 별다른 혐의가 없자 그들은 먼지라도 털어야 되겠다 싶었는지 일선 노동사무소 직원들의 식사비 등으로 지출된 1000만여원을 향응이라는 식으로 꼬투리잡아 벌금 500만원을 물렸다. 억울하고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사실 그 때 연구원은 건물 임대료 조차 겨우 만들고 나 뿐만 아니라 직원들 봉급도 몇달씩 밀려 있던 판이었다. 사정이 이리 되다 보니 건물주는 정부에 밉상이라도 보일까봐 얼른 사무실을 비워줄 것으로 요구했다. 우리는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그 날을 기약하며 눈물을 머금고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이 때 몇몇 지인이 연구원의 명맥이라도 이어가야 한다며 답십리 태양아파트 한채를 빌려줬다. 정말 “하나님은 견딜 만큼의 시련을 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생겼다. 그 때 중앙일보 기자 출신으로 연구원 일에 매력을 가져 제발로 들어와 직원으로 봉사한 사람이 있었는데,바로 2001년 민간인으로서 국방홍보원장이 된 김준범씨이다.
한국전쟁 이후 폐허가 된 국토를 피와 땀으로 일구며 ‘한강의 기적’을 연출하던 격동의 70년대는 막판으로 치달으면서 YH여공사건,부마사태,박 대통령 시해사건 등을 엮어내며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나와 연구원도 시대상황에 걸맞게 큰 시련에 부닥친 가운데 침울하게 한 시대의 마감을 지켜보고 있었다.
정리=정수익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