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학’에서 ‘세계대학’으로
어윤대(고려대학교 총장)
한국이 1만 달러 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10년 동안 제 자리 걸음만 해 온 이유는 무엇인가? 어윤대 고려대 총장은 지난 4월 14일 조찬특강에서 그 이유를 자신이 몸담고 있는 대학에서부터 찾았다.
“정치와 노사의 문제도 있겠지만 본질적으로는 대학의 책임이 제일 크다. 2만 달러 시대가 가능하려면 부가가치가 높은 상품을 개발해 국제경쟁력을 향상시켜야만 한다. 그것은 활발한 연구개발을 통해 국제경쟁력 향상을 뒷받침해야 할 책임과 역할이 대학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국 대학은 경쟁은커녕 당장 생존부터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결국 한국 경제의 미래와 한국 대학의 운명을 따로 떼어놓고 사고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와 관련 어윤대 총장은 미국과 일본의 경제를 둘러싼 ‘희비쌍곡선’에서 한국이 배워야 할 교훈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최근 미국 경제는 부활하고 있는 반면 일본 경제는 침체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러한 역전을 가능케 한 미국의 원동력은 1960년대 이후 약 20년 동안 지속적으로 진행된 연구개발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물론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는 대학을 매개로 이루어졌고, 그 중에서도 기초학문에 대한 집중적 투자가 있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일본도 5년 전부터 대학에 투자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 규모가 약 5조엔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사정은 암담하다는 것이 어 총장의 진단이다. 실제로 한국에서 대학에 대한 투자는 미국의 15∼20%, 일본의 80% 수준에 불과하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한국 대학은 지금 입학생 유치 자체가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다. 이런 상황이 몇 년간 계속되면 문을 닫아야 하는 대학이 최소한 10개는 될 것이라는 것이 어 총장의 경고이다.
“일본에선 이미 10년 전부터 국립대학의 법인화 추세가 시작됐다. 도쿄대, 교토대 등 약 90개의 국립대학에서 이미 법인화가 이뤄져 이사회의 절반이 전문기업인으로 채워졌다. 한국에서도 대학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시장메커니즘이 작동돼야 한다고 입으로는 모두들 외치고 있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가고 있다. 정부 조직보다도 더 관료적이고 중앙집권적인 교수사회의 관행이 바뀌지 않는 한 일반 기업에선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비효율적 일들이 계속 벌어질 것이다.”
한국 대학과 교수는 솔직히 경쟁을 모르고 살아왔다는 것이 어 총장의 진단이다. 그러나 WTO 도하협약으로 서비스 섹터로서의 대학 시장 개방이 불가피해진 상황에서 그런 낡은 관행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한국 대학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것이다. 펜실바니아대학이나 예일대학의 한국 분교가 들어설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한국 대학은 또 하나의 과제를 더 짊어진 셈이 됐다. 어 총장은 그것을 ‘글로벌 리더십’에서 찾는다.
“이제 글로벌 마인드가 없으면 뛰어난 지도자도, 경영자도 되기 어렵다. 이제 우리 학생들을 ‘내셔널 리더’에서 ‘글로벌 리더’로 키워야 한다. 학생들이 국내에서 장관이나 국회의원이 되기를 선망하는 것이 아니라 해외로 진출해 유엔 사무총장이나 GE의 CEO가 되는 것을 선망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키우려면 국제적인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키워주어야 한다. 다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는 능력을 키워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성공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어 총장은 두 가지를 지적했다.
“우리 대학은 지나치게 국수주의적이다. 하다 못해 논문 제목에서도 ‘한국’이라고 객관적 용어를 써야 하는데 ‘우리나라’라고 붙이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는 아마도 한국과 일본밖에 없을 것이다. 외국인과 어울려 살아가는 포용력도 중국, 인도,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국가와 비교할 때 매우 부족하다. 아울러 교육부의 대학에 대한 비현실적 규제와 제재도 개선돼야 한다.”
다음 조찬강연은 4월 22일(목) 오전 7시 소공동 롯데호텔 3층 사파이어볼룸에서 열린다. 왕운곤 중국 길림성 당서기장이 ‘한중경제협력의 새로운 과제와 전망’을 주제로 강연한다.
정지환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