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온지 7년째다. 내가 여기서 심각한 문제라고 느끼는 건 한국 지식인들이 실천적 체험없이 그냥 ‘진리의 편’에 서있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이 어느 편에도 속해있지 않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거다.”
황장엽(80) 탈북자동지회 명예회장은 5일 오전 7시 인간개발연구원 창립 29주년 기념 특별세미나에서 “한국 지식인들은 실천을 통해 뭘 변화시키겠다는 생각없이 이 사람 주장은 이게 맞고 저 사람 주장은 저게 맞다는 식으로 ‘절대 진리’만 생각하는 것 같다”며 “이런 ‘진리패’들에게 총구를 갖다대고 ‘넌 누구를 지지하느냐’고 물을 때 어떻게 답할지 궁금하다”고 한국 지식인들을 비판했다.
그는 “무엇이든 낡은 것을 계승해 새로운 혁신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 진리는 있을 수 없다”며 “이상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말이 안 된다, 무슨 문제가 됐든 해당 사람들에게 가장 절실한 게 뭔지 생각하고 그걸 기준으로 자기 입장을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측면에서 그는 “전대미문의 독재에 시달리는 2300만 북한동포를 구원하는 일이 지금 자신의 소임”이라고 강조했다.
“냉전 전략가들이 얼마나 위대한지 아느냐?”
“부모 밑에서 안락한 삶을 보낸 사람은 남의 밑에서 밥 먹는 설움을 모른다. 내가 독재반대투쟁을 한다고 하면 저 늙은이가 아직 냉전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하는데, 냉전 전략가들이 얼마나 위대한지 아느냐? 고작 냉전 당시 초등학교나 다녔을 사람들이 겉만 보고 피상적으로 얘기할 때는 그들의 가슴을 찢어버리고 싶다.
내가 북한현실을 얘기하면 곧이 듣지 않는데, 95년 당시 9개월 동안 식량배급이 끊겼을 때 평양에 잘사는 80%의 사람들이 전쟁을 요구했다. 전쟁 때보다 더 가난하기 때문에 차라리 빨리 전쟁이 일어나서 (배고픈 상황이) 끝장나야지 더는 이렇게 못살겠다는 거였다.
그리고 얼마 전에 북한전문가들이 토론하는 걸 들었는데, 제발 북한전문가라는 말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이유는 북한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더 사람들을 혼란시키기 때문이다. 북한전문가들은 김정일이 10년간 집권했다고 말하지만 실제 김정일은 74년부터 집권했다. 그리고 김정일이 파산된 국가를 물려받았다고 하는데, 정작 파산된 국가를 만든 장본인이 김정일이다. 그것도 모르면서… 그게 무슨 전문가인가?”
황 회장은 “김정일이 스탈린식 사회주의와 봉건가부장제를 적절히 합쳐 북한을 움직이고 있다”며 “그 녀석이 공부는 잘 못하면서도 이런 머리는 발달했다”고 말해 좌중에 폭소가 터졌다.
황 회장은 “그렇다고 당장 내일부터 김정일체제를 붕괴시키기 위해 전쟁하자는 것은 아니”라고 전제한 뒤 “전쟁의 방법으로 해결하려한다면 99% 실패할 것이고 그건 북한 인민도 찬성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제시한 ‘통일방법론’은 이렇다.
“독일의사(폴로첸)가 기구를 통해 삐라를 뿌린다고 했을 때 나는 시기상조라고 생각했다. 결혼식도 일 다 끝난 저녁에 술 한병 놓고 하는 판에 독일의사가 뭘 뿌린다고 받아볼 수 있겠는가. 북한 주민들이 겁이 많아 그런게(삐라 읽고 행동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을 많이 만나 대화할 형편이 못 되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통일비용이 그렇게 많이 필요한가? 어떻게 하면 2300만명을 구원할 것인가…. 머리를 써라. 우선 1년에 200만톤씩 2∼3년간 양곡을 주면 된다. 그리고 나서 남한의 자본과 기술, 인재가 북한에 들어가 일하면 된다. 10년이면 남한의 60%는 따라올 것이다. 이때까지 남북간 서로 왕래만 하게 하면 된다. 남북 붕괴선은 북한이 남한경제의 80%를 따라오면 그때 해결하면 된다.”
황장엽의 통일방법론 “우선 1년에 200만톤씩 2~3년간 양곡을 주라”
토론자로 나선 김영희 <중앙일보> 상임고문은 “주체사상의 아버지라고 불린 황 회장 스스로 판단할 때 자신의 주체철학이 2300만 북한 주민들의 행운과 불행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느냐”고 질문을 던졌다.
황 회장은 이에 대해 “나는 7살짜리 유치원생에 불과하다”며 “변명 삼아 말하자면, 주체사상 창시자인 내가 여기에서 이렇게 살고있는 건 모순이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잘못 됐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공산주의를 지지해야 하느냐? 지금 중요한 것은 내 과거를 캐는 게 아니라 2300만 북한주민을 어떻게 살리느냐가 더 중요하다, 주체사상에 대한 내 견해를 밝히라는 싱거운 말에 답하고싶지 않다”고 일축했다.
조갑제 <월간조선> 대표이사는 “남북관계를 선악개념으로 접근한 황 회장의 철학은 행동철학”이라며 “김정일 정권에 대한 투쟁의 전략을 갖고 있는 게 특징”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북한민주화를 가능하게 하려면 남한의 민주화 역량이 강화돼야 하고, 그 의미는 북한민주화에 남한정권이 참여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덧붙여 그는 “북한민주화를 이루려면 적어도 남한정부가 북한인권문제를 전면에 거론할 정도의 수준이 돼야 하는데 대북유화정책으로 주적개념을 없애버린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부는 불가능하다, 우리에게 그런 정부가 필요하다면 정권을 새로 만들어내야 한다”며 “남한의 보수세력이 과연 북한민주화나 남한정권의 민주화를 이룰 역량이 있는지, 역량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고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황 회장은 이에 대해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다.
이종훈 동아시아경제포럼 공동대표는 “우리는 살과의 전쟁을 하고 있는데, 북한은 쌀과의 전쟁을 하고 있다”며 “북한민주화의 지름길은 북한에 대한 직접투자를 늘리고 경제특구 등을 통해 남북한 경제활성화를 이루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약 2시간30분 동안 개최된 이날 토론에는 200여명의 인간개발연구원 회원들이 참가했다. 토론회에 참가한 몇몇 사람들은 “황 회장의 솔직한 심경토로에 놀랐다”는 반응이었다.
2004/02/05 오후 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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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선 기자 의 다른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