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현(전 통일부 장관)
“모를 심자마자 뽑을 순 없다”
지난 9월 16일 오전 7시 롯데호텔에서 열린 인간개발연구원 조찬강연에 모습을 드러낸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을 두고 참석자들은 “대통령이 바뀌어도 장관직을 계속 수행한 최초의 인물”(임덕규 월간 디플로머시 회장)이자 “남북협상을 위해 나라가 오랫동안 키워낸 인재”(이동희 오성연구소 이사장)라고 극찬했다. 실제로 그의 장관 임기는 2002년 1월(김대중 정부)에 시작되어 2004년 7월(노무현 정부)까지 이어졌다.
아울러 그의 장관 임기 동안 남북관계에 많은 진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남북대화 개최와 합의서 작성 횟수 등 ‘정량 평가’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1971년 8월 적십자회담 실무접촉 이후 33년 동안 남북대화는 4백78회 열렸고, 합의서는 1백43회 작성되었다. 그 중에서 6·15정상회담 이후 4년 동안 남북대화 개최와 합의서 작성 횟수는 각각 1백19회(25%)와 93회(65%)였다. 그 4년을 다시 정 전 장관 임기로 산정하면 각각 80%와 78%가 된다.
“남북간 불신과 북한의 이중성 등이 여전히 상존하고 있지만 남북교류는 놀라운 속도로 변화해 왔다. 그것은 각종 수치가 잘 보여주고 있는데, 남북왕래 인원수(1998년 3,317명→2003년 16,303명), 남북교역 액수(1998년 2.2억→2003년 7.2억)가 대표적 지표에 속한다. 특히 7억2천만원으로 집계된 남북교역 액수는 북한 대외교역 총액의 약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국가별 순위는 중국에 이어 2위). 이는 남북의 접촉이 점→선→면→공간으로 점차 확대되어 왔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5∼6년 전의 남북관계와 오늘의 남북관계는 감히 천양지차라고 말할 수 있다.”
정세현 전 장관은 특히 경의선과 동해선의 연결을 ‘평화회랑(平和回廊, Peace Corridor)’의 건설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남북대화는 ‘체제 선전’과 ‘벼랑끝 전술’만이 통하던, ‘올 오아 나싱(all or nothing)’과 ‘힘 겨루기의 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6·15정상회담을 계기로 모든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이 정 전 장관의 생각이다.
“평양에서 열린 12차 장관급 회담 때의 일이다. 환송만찬에서 1990년대 총리급 회담 당시의 이야기가 나오자 북측 대변인 안병수가 이런 회고를 했다. 그는 ‘어디 그게 회담이었느냐. 솔직히 싸움질만 한 것 아니냐. 요즘에 와서야 회담다운 회담이 되는 것 같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실제로 남북대화가 ‘일상화’되면서 회담의 성격이 갈수록 ‘전문화’와 ‘실무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장성급 회담과 국장급 회담이 늘어나고 있으며, 국장급 회담 때는 실무자로 과장급까지 참여하게 된다. 더욱이 그들은 개성과 파주, 금강산과 설악산을 오가며 ‘출퇴근 회담’까지 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남북관계는 매우 경색돼 있다. 조문 문제와 탈북자 대량입국 문제 등을 이유로 북측이 7월 이후 남북대화 일정에 대한 협의를 전면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 전 장관은 너무 비관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남북관계의 파경 자체를 원하지 않는 북측이 기본적으로 필요한 조치는 계속 취하고 있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우선 북측은 회담이 단절된 7월 이후에도 3천여 명이 넘는 민간인의 방북을 허용했다. 더욱이 선군정치(先軍政治)라는 최고의 통치이념에도 불구하고 비무장지대 선전수단 제거, 서해상 함정간 교신 등의 전향적 조치에 합의하고 실천에 옮겼다. 아테네올림픽 공동입장(8.13), 임남댐(금강산댐) 방류계획 사전통보(8.14), 개성공단 부동산 규정 발표(8.24)도 고무적인 현상이다.”
정 전 장관은 지난 9월 10일부터 이틀 동안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역사학자대회에서 고구려사 문제에 남북이 공동 대처하기로 한 것도 의미가 매우 크다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남북관계는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정 전 장관은 이런 해답을 제시했다.
“우리 정부가 김정일을 비판하고 인권문제를 거론해야 한다는 분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협상과 교류를 통해 북한의 경제가 바뀌면 정치도 자연스럽게 바뀐다. 모를 심어놓고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안 자란다고 뽑아버리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 앞으로 북핵 문제가 해결국면으로 들어가고, 북한이 중국·러시아·베트남의 성공사례를 압축적으로 ‘벤치마킹’하게 되면 북한의 변화와 남북관계에는 더욱 가속도가 붙게 될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남북관계나 통일문제에 대한 논의는 통일에 대한 ‘예보’와 ‘대비’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정지환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