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욱(삼성인력개발원 원장)
“세종의 지혜가 일류 삼성의 비밀”
삼성이란 기업을 빼놓고 어찌 한국 경제를 말할 수 있으랴. 삼성에 대한 사적인 호불호(好不好)의 감정과 상관없이 이 말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른바 ”일류 삼성”의 오늘을 있게 한 저력의 원천은 무엇일까. 지난 8월 12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2층 에메랄드룸에서 열린 인간개발연구원 조찬강연에서 손욱 삼성인력개발원 원장이 그 비밀의 일단을 털어놓았다. ”초경쟁력 시대의 기술개발과 CEO 리더십”이라는 강연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손 원장이 제일 먼저 강조한 것은 ”기술개발”이었다.
“호암(湖巖) 이병철 선대 회장은 ”인재제일”을 강조했다. 이건희 현 회장은 ”자율경영, 인간존중, 기술중시”를 강조한다. 여기서 공통으로 추출되는 것이 인간과 기술이다. 그리고 기술은 결국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다. 실제로 삼성은 기술개발에 각별한 애정을 쏟고 있는데, 1년에 한번씩 선진국 초일류 기업이 생산한 제품과 삼성의 제품을 비교하는 전시회를 연다. 직원들의 동기부여를 위해 마련된 이 자리에는 이건희 회장도 꼭 참석한다. 기술개발이 경쟁력의 원천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 초일류 기업인 GE의 저력도 에디슨연구소에서 비롯됐다는 말이 있거니와, 1987년 10월 22일 설립된 기술원은 삼성 CEO의 강력한 연구개발(R&D) 의지가 반영된 회사다. 현재 1년 예산 2천4백90억원, 종업원 9백30명(박사학위 38%)에 이르는 이 ”R&D 전문회사”는 사실 호암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다. 기술원이 설립된 지 한 달 후 호암이 타계한 것을 두고 나온 말이다. 실제로 “삼성의 미래를 주도할 최첨단 기술의 산실”로 불리는 기술원 빌딩 7층에는 호암의 사무실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고 한다.
”무한탐구(無限探求)”. 호암이 기술원의 설립 이념으로 제시하며 남겼던 친필 휘호이다. 그렇다면 호암이 ”탐구(探究)”가 아니라 굳이 ”탐구(探求)”라고 쓴 이유는 무엇일까?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전자는 “진리나 법칙 따위를 더듬어 깊이 연구함”이라고, 후자는 “소용되는 것을 더듬어 찾아 구함”이라고 되어 있다. 용례(用例)는 전자와 후자가 각각 “진리의 탐구”와 “물자의 탐구”로 되어 있다. 호암이 R&D에서 ”품위”보다 ”실용”을 중시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해석하면 지나친 비약이 될까. 손 원장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 그것이 비약만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R&D에도 아마추어와 프로의 세계가 있다. 과거에는 ”뛰어난 과학자(scientist)”를 찾아내서 지원하면 그만이었고, 그들도 세상과 등진 채 연구실에만 파묻혀 지내도 됐다. 그러나 이제 세상은 바뀌었다. 아무리 혁혁한 기술개발을 했다고 해도 타이밍을 맞추지 못해 사업 기회를 상실하거나 원가 개념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 프로 세계의 R&D는 ”돈 버는 기술자(engineer)”를 요구한다. R&D가 고객의 마음까지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사실 기술원도 처음 10년 동안에는 R&D의 사업 성공 확률이 18%에 불과했다고 한다. 기술혁신과 사업개발을 결합하는 ”제4세대 R&D체제”로의 질적 전환은 불가피했다. 이를 위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프로세서 구축 기법인 ”식스 시그마(six sigma)”, 연구개발 부서와 사업개발 부서의 괴리를 극복하기 위한 ”고객과 함께 기획(technology roadmap)”, 연구원 1인마다 세계적 고수(高手) 10명과 네트워크를 맺는 ”G-PRO 10 프로젝트” 등을 강력하게 실시했다. 회사원을 병사(兵士, soldier)에서 전사(戰士, warrior)로, 매니저(manager)에서 리더(leader)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그 결과 마침내 R&D의 사업 성공 확률은 61%로 급성장했다.
마지막으로 손 원장은 “세종대왕의 지혜를 되살리자”고 강조했다. 손 원장의 설명에 따르면, 세종대왕이 통치하던 15세기 초반의 조선은 ”세계적인 과학기술 초일류 국가”였다. 따라서 21세기 한국을 선진국으로 만들기 위한 지혜도 여기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세종대왕은 당대 백성(=농민)의 기본산업인 농업의 발전을 위한 R&D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성과로 나타난 것이 △농사직설(농업 부강) △향약집성방, 의방유취(농민 건강 생활) △칠정산 내편과 외편, 대간의대, 자격루(환경과 기후 변화 대응) △측우기, 세법 개정(공정한 조세제도) △거북선, 화포, 화차(국민 안전 보장) 등이다. 당, 원, 이슬람과 조선을 비교 연구하도록 한 것은 ”벤치마킹”, 집현전을 설치한 것은 ”인력개발을 통한 인재양성”, 법과 제도를 정비한 것은 ”합리적 프로세스 혁신”, 훈민정음과 갑인자의 창제는 ”정보화와 지식사회 구축”에 비유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R&D의 성과가 모두 백성의 행복한 삶(CQT)으로 귀결됐음은 물론이다.”
정지환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