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과 정조의 리더십은 용인술”
이이화(역사학자)
개인이 저술한 최초의 통사(通史)로 평가받는 <한국사 이야기>(한길사)가 마침내 22권으로 완간됐다. 문학에서 역사로 전향(?)한 어느 재야 역사학자가 10년 동안 감당했던 ‘저술감옥’의 고통이 잉태시킨 귀중한 산물임은 물론이다. 지난 6월 17일 서울시 소공동 롯데호텔 2층 에메랄드룸에서 열린 인간개발연구원 조찬강연에 ‘저술감옥’에서 갓 출옥(?)한 재야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의 강연 주제는 ‘역사인물을 통해 배우는 오늘의 리더십’. 이이화 선생이 ‘오늘의 리더십’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시킨 ‘과거의 역사인물’은 세종과 정조였다. 조선시대 최고의 성군(聖君)으로 꼽히는 터라 두 통치자의 업적은 익히 잘 알려져 있는 셈이다. 훈민정음 창제와 천문과학기술 발달(세종), 실학 장려와 화성 건설(정조)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정작 잊지 말아야 할 업적은 그것만이 아니라고 한다.
“특히 세종은 뛰어난 외교력을 발휘해 말(馬)과 금은(金銀)의 유출을 막았다. 당시 조선은 명나라에 2만 필의 말과 엄청난 양의 금은을 조공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건국 초기에 긴요하게 쓰여야 할 국부가 유출될 위험에 직면한 세종은 명나라 수도인 남경의 외교가에 금강산 인삼의 뛰어난 효능을 알리는 전술을 채택했다. 진시황 시절의 불로초를 연상케 하는 이 홍보전은 그대로 주효했고, 명나라는 말과 금은 대신 인삼을 달라고 했다. 적서차별과 지역차별을 철폐한 정조의 업적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우리가 세종과 정조에게서 배워야 할 리더십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이화 선생은 제일 먼저 ‘인재등용과 용인술’을 꼽았다.
“세종과 정조는 용인술이 뛰어났다는 점에서 닮았다. 우선 두 통치자는 ‘시스템을 통한 인재등용’의 묘미를 알고 있었다. 실제로 세종은 집현전을 통해, 정조는 규장각을 통해 새로운 인물을 발굴하고 양성했다. 그들이 나중에 왕권강화의 친위세력이자 개혁추진의 주체세력이 됐음은 물론이다. 아울러 두 왕은 일단 신하에게 임무를 맡기면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전권을 부여할 줄도 알았다.”
이런 등용 과정을 거쳐 재상이나 요직에 올라 능력을 발휘한 인물은 많다. 황희, 맹사성, 김종서(세종)와 채제공, 정약용, 박제가(정조) 등이 바로 그들이다. 전자의 인물들이 청렴하고 성실한 인간형이었다면, 후자의 인물들은 개혁적이고 합리적인 인간형이었다는 것이 이이화 선생의 분석이다.
“세종은 온건하고 중도적인 황희를 장기간에 걸쳐 영의정에 등용했다. 황희는 타협과 조정에 능한 현실적 정치인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중국의 혁명을 이끈 모택동-주은래 커플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정조는 지방수령에게 권한을 대폭 부여하는 방법을 선호했다. 오늘날의 청와대 비서실인 승정원을 거치지 않고 왕에게 직접 보고서를 올리도록 했으며, 지방정부의 관료인 이서에게도 비리를 고발할 권한을 주었다. 서울에서 행사가 있을 경우 그들을 초청해 밤새워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최근 회자되는 지방분권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한편 뛰어난 군주가 되기 위해선 ‘인문학적 소양과 검소한 품성’도 필요하다는 것이 이이화 선생의 지적이다. 실제로 세종과 정조는 학문과 문화와 예술에 대한 소양이 매우 높았을 뿐만 아니라 부지런하고 검소한 성품, 낮은 신분의 사람과 타 종교를 업신여기지 않는 애민과 관용의 자세까지 지녔다.
“두 왕은 철저하게 금욕적인 생활을 실천했다. 특히 정조는 하루에 두 끼 밖에 먹지 않았는데, 그것도 부족했는지 4가지 이상의 반찬을 올리지 못하도록 했다. 평소에도 무명옷을 즐겨 입은 정조는 고기를 잘 먹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여자까지 멀리했다. 세종도 나라에서 나오지 않는 식물이나 동물로 만든 음식은 아예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과 정조가 각각 54세와 49세에 타계한 것은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고 했던가. 세종과 정조가 등장하기 전에 태종과 영조가 외척을 제거하고 탕평책을 실시하는 등 정지작업을 해놓은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역대의 다른 왕들과 비교해 볼 때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무고하게 사람을 죽이지 않은 것도 세종과 정조의 공통점이다. 성군이 만들어지기 위해선 천시(天時)와 지시(地時)와 인시(人時)가 맞아떨어져야 한다는 세간의 말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닌 듯하다.
정지환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