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를 절대로 무시하거나 방치하지 않는다는 걸 인간개발연구원을 설립하고 얼마 안되어 확인할 수 있었다. 나의 진지한 기도를 받아들인 하나님은 짧은 시간에 연구원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도록 응답해 주셨다.
나 또한 하나님의 도움을 받들어 지성으로 노력했다. 인간개발경영자조찬회에서 다룰 주제를 선정하기 위해 모든 국내 간행물을 탐독하고 훌륭한 강사를 모시기 위해 숨이 차도록 뛰었다.
설립 1년도 채 되지 않아 연구원은 당시 주요 일간신문에 소개되는 등 사회의 주목을 받는 단체로 부각됐다. 덕분에 충무로의 허름한 사무실에서 광화문 대경빌딩(현 교보빌딩 자리)으로 이전,‘광화문시대’를 열게 됐다.
이 때 마침 같은 건물을 쓰던 미국문화원은 연구원의 비전과 활동을 알고는 폴 마이어의 LMI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회를 여는데 도움을 줬다. 이 프로그램도 단번에 언론 보도를 타면서 연구원과 함께 크게 주목을 받았다.
거기다 나 개인과 연구원이 획기적으로 부각되는 기회를 맞았다. 1976년 현대경제일보(현 한국경제신문)에서 ‘인간자산 개발 지상 캠페인’을 벌이자는 제안이 있어 이에 응했다. 매주 1면씩을 할애해 1년간에 걸쳐 진행된 이 캠페인에는 남덕우 부총리가 직접 휘호를 써 줬고,심의환 상공부 차관을 비롯한 많은 연구원 멤버들이 동참,인간개발 문제가 거국적인 바람을 일으키도록 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정열적으로 추진하던 ‘새마을운동’ 간부교육과 제4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과분하게도 남덕우 부총리로부터 ‘인적자원개발’ 공로로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그러자 다음해인 1977년 서울경제신문 권혁승 편집국장(뒤에 서울경제신문과 한국일보 사장 역임)이 칼럼을 게재하자고 했다. 언론에 순수한 나의 생각을 주 2회씩이나 연재한다는 게 여간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런데 그 연재가 무려 1년1개월 동안 101회나 이어졌다.
지금도 당시를 회상하면 가슴이 뿌듯해진다. 끊임없이 걸려오는 격려전화 등 폭발적인 독자들의 반응이 귀찮을 정도였다. 간혹 개인사정으로 한 회라도 건너뛰면 신문사와 연구원 사무실로 항의가 빗발쳤다.
칼럼이 연재되던 중엔 이런 일화가 있었다. 금융계 지도자였던 김진형(전 한국은행 총재) 국제금융공사 회장이 전화를 걸어와 식사를 하자고 해 만났다. 이 분은 내 칼럼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고는 “공사 직원들이 최상의 대우를 받고 있음에도 불평이 많다”며 푸념을 했다. 그 때 나는 “아,최고의 금융 전문가에다 박학다식하기로 유명한 이런 분도 아직 인간개발의 문제에 대해선 많이 무지하구나”하는 생각으로 매슬로의 ‘인간욕구 5단계론’을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성경말씀을 곁들여 설명해 줬다. 그러자 그 분은 “정말 좋은 이론이군요”하며 좋아했다.
초창기 경영자조찬회의 주된 관심사는 산학협동과 상호교류였다. 기업인과 학계 전문가 사이에 토론과 대화의 장을 만들고 상호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주안점을 뒀다. 그리고 이 의도는 크게 주효했다. 그러자 정부 책임자들의 동참도 속속 이어졌다.
이러다 보니 일의 범위가 자연스럽게 넓어졌다. 다소 뒤의 일이지만 그래서 1979년 인재육성에 초점을 맞춘 ‘목요 인간개발연구회’를 만들었다. 이어 다음해엔 두 연구회를 하나로 모아 명실공한 최고의 연구모임으로 만들기 위해 ‘인간개발경영자연구회’라는 하나의 모임으로 통합,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때부터 비로소 재계,학계,정계를 비롯해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모임으로 거듭나게 됐다. 또 이는 갈수록 강력한 휴먼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게 해줬다. 연구회 강사를 거친 이들이 끊임없이 장관으로 기용되자 연구원은 ‘장관 산실’이란 기분좋은 별명까지 얻었다. 반면 유명인사들을 상대로 ‘밥장사’를 한다는 이상한 말에 실소를 금치 못하기도 했다.
정리=정수익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