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관념을 깨라, 그러면 사랑할 수 있다
[속보, 기타] 2004년 02월 26일 (목) 18:13 [오마이뉴스 장윤선 기자]
▲ 콜린 히긴스의 연극 <19 그리고 80>에서 ‘명랑한 철학자’ 할머니 모드로 분한 배우 박정자.
ⓒ 오마이뉴스 권우성
여든에 열아홉을 만나 사랑에 골인한다면…. 주책 맞은 늙은이가 젊은애한테 반해 넋이 나갔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연극배우 박정자는 요즘 열아홉 청년과 밀어를 속삭이고 있다. 남편을 잃고 인생에 달관한 할머니 모드(박정자 분)는 진정한 사랑을 찾아 헤매는 청년 헤롤드(김영민 분)와 영혼이 맑은 사랑에 빠진다.
“아유, 걱정하지 말아요! 헤롤드는 자신이 원하는 짝을 스스로 찾을 거예요.”
헤롤드의 혼인을 걱정하는 어머니 체이슨 부인에게 모드는 넉살을 떤다. 그리고 헤롤드가 모드에게 사랑고백을 하면서 결혼하자고 할 때 간단히 말했다.
“이미 늦었어. 벌써 1시간 전에 약을 먹었거든. 소용없어, 전화하지마. 그들(119)이 오기 전에 난 갈 거야.”
콜린 히긴스의 연극 <19 그리고 80>에서 ‘명랑한 철학자’ 할머니 모드로 분한 배우 박정자는 사사로운 일상에 대해 부질없는 짓은 그만 하라고 외친다.
18일 오후 5시30분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모드로 분한 박정자씨와 짧지만 긴 여운이 남는 인터뷰를 했다.
“이 연극을 통해 굳이 메시지를 전하지 않아도 관객이 이미 다 알 거예요. 사랑, 평화, 행복…. 인간이 다 원하는 바지만 참 쉽게 안 되는 그런 문제를 툭툭 던지는 거지요. 연극 대사에 불과하지만 자신의 일상을 돌아보면 과연 어떤지.”
박정자씨는 “이 작품은 1940년대 사랑과 전쟁을 얘기하지만, 우린 지금 또 기가 막히는 이라크 전쟁을 본다”며 “참으로 마음이 아프지만 전쟁이 없는 인간의 평화가 있을까”라고 말끝을 흐렸다.
“이라크 전쟁은 끝났지만 지금 더 무서운 상황”
ⓒ 오마이뉴스 권우성
“인간은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어요. 평화로운 시기라도 지구 어느 한켠에서는 언제나 총질이 있지요. 나는 솔직히 그에 관한 한 희망이 없어요. 전쟁을 통해 인류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나 우린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지요. 그럼에도 인간은 또 싸워요.
파병? 나라를 위해 하는 일이라면 희생이 따르더라도 해야겠지요. 이러면 내가 찬성론자가 되는데…. 내가 전쟁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린 언제나 약자의 입장이었고, 지금도 우리는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도 이라크에 갈 수밖에 없지 않나 그런 생각입니다.
바라는 게 있다면, 전쟁을 통해 더 많은 무기를 만들고 이익을 더 많이 챙기겠다고 하지 말았으면 해요. 이라크전쟁을 보세요. 전쟁은 끝났지만, 지금이 더 무서운 상황이잖아요.”
박정자씨는 연극을 통해 인간을 얘기한다. 인간의 치졸한 내면, 사랑, 박애 등.
“내가 피켓을 들고 거리에 나가지는 않지만 나 스스로 정직하게 살면서 무대 위에서 하는 말이 누군가의 가슴에 한 점이 된다면 그 자체로 의미있는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최근 ‘위안부 누드’로 파문을 일으킨 이승연씨에 대해서도 박정자씨는 한발 물러서서 전체를 관조했다.
“표현의 자유가 있지요. 만일 우리 나라가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그 일이 벌어졌다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해봐요. 우린 어떤 사건이 터지면 집단으로 대항하는 경향이 있지요. 세상에 상업적이지 않은 건 없습니다. 이번 누드도 마찬가지죠. 나는 상업적인 걸 옳다 그르다는 잣대로 보기 힘들다고 생각해요. 다만, 이승연이 심사숙고하지 못한 점은 인정되지요. 하지만 그이는 모델에 불과하고 진짜 책임은 해당 사 사장이 지는 게 맞지 않나요? 그 점에선 난 그 사장이 비겁하다고 봐요.”
산불을 보면 화가 나서 미치겠고, 종이컵을 쓰거나 나무젓가락으로 음식을 먹는 사람을 보면 눈을 흘기게 된다는 박정자씨는 “투쟁보다는 사랑으로 인간의 정서를 보듬어 안고 좀더 아름답고 밝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하여간 인간이 제일 고약해!”
“하여간 인간이 제일 고약해. 나는 산불이 나서 소나무가 이글이글 타고 있는 걸 보면 너무 화가 나요. 조금만 주의하면 나무를 다 살릴 수 있는데 그들을 죽게 내버려둔 인간의 부주의가 원망스럽지요. 그런 인간을 대상으로 ‘순화’시키는 일을 하고 싶어요.”
언제나 무대 위의 카리스마로 관객을 사로잡았던 배우 박정자는 예순이 넘은 지금 곰살 맞은 사랑이야기를 하면서 ‘잃어버린 삶의 활력소’를 찾으라고 권하는 듯했다. 돈과 권력, 명예에 찌들어 정말 추구해야할 아름다운 인생을 놓친다면 그처럼 안타까운 일이 또 있겠냐고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것 같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환갑을 넘긴 배우 박정자는 팔순까지 <19 그리고 80>을 통해 사랑하고 싶단다. 주변에선 “아유, 박정자 욕심도 많아!” 하겠지만 스스로 사랑하면서 사랑바이러스를 관객들에게 전파하고 싶기 때문이란다. 얼마 전에 본 훈훈한 사랑도 참으로 감미로운 사연이라며 들려주었다.
“대구지하철참사 1년이 지났잖아요. 당시 아들과 딸자식 둘을 잃은 부모가 애기를 입양했어요. 혹시 봤어요? 너무나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조그마한 애기가 앨범을 펴놓고 다 커서 사고로 죽은 부모의 아들과 딸 사진을 바라봐요. 요즘처럼 냉엄한 시기에 이렇게 아름다운 사연이 또 있을까요? 매일 똑같은 소리나 하는 정치뉴스에서 볼 수 없는 희망을 전 이 사람들에게서 느꼈습니다.”
바람은 차지만 봄이 왔다. 여든에 열아홉을 기대한다면 도둑놈 심보라고 욕할지 모르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 박정자씨는 인간개발연구원 경영자포럼에서 흰머리 수북한 노인들 앞에서 “고정관념을 깨라, 그러면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모두에게 ‘모드와 헤롤드의 사랑’같은 행운이 오기를 기대할 수 없지만, 생동하는 봄날 다들 ‘연애’하시길.
/장윤선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