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틱 함대가 패배한 진짜 이유
정태익 외교안보연구원 대사
주일본대사관 1등 서기관, 주라이베리아대사관 참사관, 주미국대사관 참사관, 주이집트 대사, 주이탈리아 대사, 주러시아 대사, 외무부 미주국장·제1차관보·기획관리실장,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비서관, 외교안보연구원 원장,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수석….
정태익 외교안보연구원 대사의 외교관으로서의 탄탄한 경력은 그가 베테랑 외교관의 전형임을 웅변해주는 명백한 물증인 셈이다. 특히 주러시아 대사로 외교 현장의 마지막을 장식한 그이기에 ‘새로운 동북아 질서와 한러 관계’에 대해선 할 말이 더 많을 수밖에 없다. 그 중에서도 우선 그는 동북아 질서의 새로운 특징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강연회의 서막을 열었다.
“동북아 질서의 특징은 무엇보다 먼저 중국의 급격한 부상과 미일동맹의 강화라는 두 가지 현상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이 두 개의 커다란 흐름은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경쟁한다. 동북아 질서를 독해할 때 다중적이고 다층적인 접근방식이 절실히 요구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예컨대 중국은 의도적으로 민족주의를 고취함으로써 거대 국가의 통합을 도모한다. 물론 그러한 시도는 필연적으로 주변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중국이 일본이나 미국과의 관계를 파국으로까지 몰고 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미국의 국채를 제일 많이 사들이는 나라가 중국이라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동북아를 구성하는 각 국가는 이미 경제적인 이해관계로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의 동북공정, 고이즈미의 신사참배 등 일부 현상에 집착하여 동북아 질서를 갈등구조만으로 이해하려는 주류 언론의 상업주의적 보도태도는 시대적 흐름과 동떨어진 오도된 국제관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각별한 감시와 주의가 요망된다고 하겠다.
아울러 이러한 동북아 질서의 복합성이야말로 대한민국이 과거의 외교적 패러다임에 안주하지 말고 새로운 진로를 모색해야 하는 운명적 상황이기도 하다는 것이 정 대사의 간곡한 주장이다. 그런 점에서 남북화해 카드의 적극적인 활용을 통해 동북아 평화와 번영의 균형자로 나서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우리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미 그러한 전례를 독일에서 확인한 바 있다. 서독과 동독은, 특히 그 중에서도 서독은 낡은 유럽의 새로운 활로를 열기 위한 절체절명의 과제였던 유럽통합의 산파역을 자임하고 나섰다. 독일은 그렇게 EU의 탄생에 결정적이고 주도적인 기여를 함으로써 주변국의 불신과 우려를 말끔히 해소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유럽 전체의 축복까지 받으며 통일을 이뤄낼 수 있었다. 우리가 남북의 화해와 교류를 지렛대 삼아 동북아 지역의 협력과 통합의 매개자로 나서야 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동북아의 균형자 역할을 적극적으로 담당해내지 못하면 도리어 동북아 질서의 양대 축을 형성하고 있는 중국과 미일동맹의 틈바구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실제로 1백년 전의 역사는 강대국이 충돌하며 동북아 질서가 흔들릴 때마다 한반도의 운명이 매우 위험한 상황에 빠졌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증언해준다. 정 대사는 “역사를 망각하는 자는 역사의 처벌을 받는다”는 러시아 속담을 소개하는 것으로 다시 한번 자신의 속내를 분명히 드러냈다. 그렇다고 그가 기존의 한미동맹을 부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동북아 질서에서 우리가 생존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라도 한미동맹은 너무나 중요하다. 그나마 우리가 세계 경제 11위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한미동맹이라는 든든한 배경의 존재와 결코 무관치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미 그러한 전례를 러일전쟁에서 확인한 바 있다. 신흥 공업국에 불과했던 일본이 당시만 해도 강대국이었던 청나라와 러시아에 잇따라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 중의 하나가 바로 영국 및 미국과 맺었던 동맹이었다. 세계 최강의 발틱 함대는 애초 수에즈 운하를 거쳐 곧바로 일본 열도를 치겠다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이 동맹국인 일본을 위해 수에즈 운하를 열어주지 않았고, 아프리카 대륙을 우회해야 했던 발틱 함대는 일본에 도착하기도 전에 전력과 전의를 모두 상실하고 말았다.”
좌로도 치우치지 말고 우로도 치우치지 말라는 격언이 있다. 동북아 질서 속에서 한반도의 운명을 지혜롭게 타개해 나가기 위해 지금 가장 필요한 덕목도 바로 이 중용의 미덕이 아닐까.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무시하지는 말되, 러시아를 비롯한 동북아 구성원과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남북의 화해와 교류를 통해 막혔던 휴전선을 뚫고 대륙으로 진출, 다시 TSR(시베리아횡단철도)을 통해 저 유럽으로 달려가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러시아와의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정지환 기자 [email protected]
정태익 대사의 이력서
▲ 서울대 법학과 졸업
▲ 서울대 법학 석사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 구주정치학 석사
▲ 주일본대사관 1등 서기관
▲ 주라이베리아대사관 참사관
▲ 외무부 미주국장, 제1차관보, 기획관리실장
▲ 주미국대사관 참사관
▲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비서관
▲ 주이집트 대사
▲ 주이탈리아 대사
▲ 외교안보연구원 연구위원, 원장
▲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수석
▲ 주러시아 대사
상훈: 홍조근정훈장, 이탈리아 대십자기사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