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과 순경, 좌절과 희망이 교차하는 내 인생길에는 유달리 많은 사람과 관계가 맺어진다. 내가 하는 일의 성격상 많은 사람과 부대낄 수밖에 없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지극한 은총이 개입됐음을 절실히 느낀다. 혹자는 우스갯소리로 “우리나라에서 장 회장만큼 발이 넓은 사람은 없을 거요”라고 말하면 나는 주저 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도움이죠”라고 응수한다.
이런 점에서 나는 기독교계 지도자들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특히 여의도순복음교회 당회장인 조용기 목사님이 인간개발경영자연구회에서 남겨준 감동은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된다. 조 목사는 ‘경제적 부의 추구와 기업경영자의 궁극적 관심사’라는 강연에서 전문가를 능가하는 식견을 과시하며 참석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
강연과 토론을 마친 뒤 조 목사는 내 손을 잡으며 “연구원의 활동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며 격려해줬다. 조 목사는 이후 교회에서 개최한 큰 집회에 나를 강사로 초청해주기까지 했다. 그는 거인같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절제된 겸손과 예의를 갖춘 성직자의 모습으로 내 머릿속에 각인됐다.
이와 함께 인간개발연구원을 운영하면서 맺은 많은 인연 가운데서 역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역대 회장들이다. 지금은 ‘감자탕교회 이야기’ 저자로 잘 알려진 양병무 원장(경제학박사)에게 실무 책임을 넘겨주고 내가 회장을 맡고 있지만 그 전에 6명의 회장이 거쳐 갔다. 모두 관록이나 인품에서 만인의 존경을 받을 만한 분들로 만약 나에게 성취가 있다면 모두 그 분들 덕분이다.
초대 회장(1975∼1978) 박동묘씨는 농림부장관과 농업경제연구소장 등을 지내면서 3공화국 시절 농촌 잘살기 운동과 화폐개혁 등을 제안한 학자이자 행정가였다. 대학교육연합회장과 성균관대 총장을 맡고 있으면서도 흔쾌히 회장직을 수락, 초창기 연구원의 방향을 잡아줬다.
이어 주원(1978∼1985) 회장은 2대부터 4대까지 8년간 최장기간 연구원 수장을 맡았다. 건설부장관 시절 고속도로 건설을 비롯한 국토개발정책을 강력히 추진한 그는 연구원 일이라면 몸을 사리지 않았다. 회장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계속 연구회에 참석, 동지애를 과시한 그는 연구원 하계세미나가 진행 중일 때 타계, 눈물 속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요즘도 나는 연구원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자상하게 조언을 해주던 그를 떠올린다.
다음 배턴을 이어받은 이는 5대 최형섭(1985∼1988) 회장. 한국과학기술원(KIST)을 설립하는 등 과학기술정책을 총괄한 그는 강직하면서도 포근한 인간미를 가졌으며 연구원에 과학기술계 인맥을 연결해줬다.
6대 이한빈(1988∼1992) 회장은 국내외 외교계 거물들을 연구원에 초빙, 회원들에게 국제적 안목을 키워주었다. 외교관을 거쳐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낸 그는 항상 나에게 거목같았다. 상공인 20여명과 함께 소련을 방문, 개척자로서의 역할도 했다.
사적으로 크게 가까웠던 7대 이규호(1992∼1994) 회장도 연구원 설립 때부터 줄곧 관여한 분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항상 연구원의 방향과 비전에 대해 나와 함께 고민했다. 5공화국 통일부장관과 문교부장관 등을 지낸 그는 주일대사 시절 일본과의 외교관계가 문제시되자 연구원에 불똥이 튈까 회장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1994년부터 2001년까지 8∼10대 회장을 역임한데 이어 현재는 이사장을 맡아 도와주고 있는 최창락씨는 한은총재 동자부장관 등을 지낸 풍부한 행정경험을 살려 연구원 운영에 산소 역할을 해주고 있다.
2001년부터 명예회장을 맡고 있는 조순씨는 7대 회장을 맡기로 했다가 갑자기 정계로 진출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경제학자로서의 뛰어난 학식과 감각을 갖춘 그는 연구원의 보배같은 존재이다.
전면에 나서진 않았지만 이종원 전 법무장관은 20년 이상 연구원 프로그램 기획에 참여하면서 물심양면으로 격려와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고희를 넘긴 지금도 그는 연구회 때마다 참석해 항상 진지한 탐구의 모습으로 나에게 많은 자극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