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일 아침 깨어나면 먼저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정신을 가다듬은 다음 조용히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는다. 그리고 마음을 최대한 경건하게 하고서 하나님을 찾는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그 분의 뜻에 합당하게끔 지낼 수 있도록 간구한다. 그래야만 평온한 상태에서 하루 일과를 시작할 수 있다.
1974∼75년 인간개발연구원 설립 당시 나는 참으로 많은 기도를 했다. 내 일생에서 그렇게 많은 기도를,그렇게 진지하게 기도한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기는 어려울 것같다. 그때 내가 하고자 한 일이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기도 덕분에 연구원이 탄생했고 지금까지 비교적 잘 운영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같은 사무실을 쓰던 한국CBMC가 YMCA 건물로 이사한 뒤 나는 본격적으로 인간개발연구원 일에 몰두했다. 그러나 막상 어떻게 일을 풀어나가야 할지 난감했다. 그리고 무슨 일이라도 하려면 인력이 있어야 하는데 내 옆에는 오직 한 사람밖에 없었다. 밖에선 동료이자 든든한 조력자였고 집에서는 아내였던 엄경애씨가 유일한 직원이었다. 아내는 지금도 연구원의 주사업인 ‘LMI(Leadership Management International)’의 대표직을 맡아 큰 역할을 무리없이 해내고 있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연구원 일을 하기 위해선 내 발로 여기저기 뛰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분주히 뛰어다니자 고맙게도 뜻있는 분들이 관심을 보여주었다. 하나님의 배려였다. 대학교육연합회 회장과 성균관대 총장을 역임한 박동묘 전 농림부장관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이규호 전 문교부장관을 비롯해 정한택 서울대교수,정수창 OB그룹 회장,조권순 유한양행 사장,박승찬 금성사(현 LG전자) 사장,김연규 중소기협중앙회 회장,박은회 대한재보험 사장 등 여러분들을 임원으로 영입,연구원의 골격을 짰다.
그런데 연구원은 출발부터 쉽지 않았다. 문교부 사회교육과 산하 공익법인으로 등록하려고 했으나 벽에 부닥쳤다. 당시 문교부에선 모 기업체 문화재단의 탈세사건으로 모든 법인체의 인허가를 모두 금지해 놓았다.
어떻게든 법인으로 등록시키는 게 급선무였던 나로선 계속 정부 관계자들과 접촉을 해나갔다. 그러던 중 과학기술처 산하 법인으로 등록하는 길이 있음을 알게 됐다. 그 과정도 쉽지는 않았지만 끈질기게 노력한 결과 성사시킬 수 있었다. 당시 과기처 장관은 최형섭씨였는데 훗날 관직에서 물러난 뒤 연구원 회장으로 왔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귀한 인연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다음 순서는 연구원 설립의 모델이 된 폴 마이어의 ‘LMI’의 교육 프로그램을 어떻게 도입하느냐가 문제로 대두됐다. 이한빈 숭실대학장을 비롯,서울대 정한택 정양은 교수 등은 이 프로그램의 가치와 사업화 가능성에 대해 충분히 인정을 해줬다. 그럼에도 50만원 정도의 거금을 들여,그것도 영어로 된 프로그램 도입에 투자할 만한 기업체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LMI 프로그램 도입을 뒤로 미룬 나는 한국식 인재육성 방법을 연구하기로 했다. 당시 내 머릿속에는 온통 ‘하나님’과 ‘인간개발’뿐이었다. 눈만 뜨면 ‘인간개발’에 대한 숙제를 풀기 위해 머리를 싸맸고 하루에도 몇번씩 간절한 기도를 했다.
“하나님,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들을 내면에 잠재시켜 놓고 활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인간개발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여기고 매달리려 합니다. 저를 도와 주십시오….” 지금도 당시 하나님께 기도했던 내용이 생생하게 기억된다.
하나님은 역시 나의 기도를 외면치 않았다. ‘사람들은 누구나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는 것과 함께 기독교계에서 보편화된 조찬기도 방식이 언뜻 뇌리를 스친 것이다. 나는 무릎을 치면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올렸다. 그리고는 ‘인간개발경영자조찬회’를 만들기로 하고 작업에 들어갔다.
정리=정수익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