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실로 오묘하기 그지없었다. 하나님은 ‘KMI’라는 회사를 부도내면서 자신의 뜻을 알려주셨다. 사업체 운영 등으로 부를 쌓는 일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개입된 일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KMI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겪은 혹독한 시련에 대해서 잠깐이라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내 밑에서 일하던 상무 총무과장 등 핵심 직원들이 도주한 상태에서 세무조사가 벌어졌고 나는 졸지에 범법자로 몰릴 판이었다.
일단 소나기는 피하고 보자는 생각에서 여기저기 숨어다녔다. 그러나 생각하면 할수록 억울함이 솟구쳤다. 물론 KMI가 개인회사이긴 했지만 주로 국가를 위해서 일했고 주거래처가 정부였는데 이럴 수는 없다고 판단,조사관들에게 진실을 알리고 선처를 호소했다. 그들도 조사를 하면서 정부 관계자들이 많이 개입된 것을 알고는 적당하게 마무리해 주었다. 회사와 내 수중의 모든 것을 내놓고 마음의 상처만 안은 채 정리했다.
나는 KMI를 운영하는 과정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는 끈끈하게 이어갔다. 출석하던 새문안교회에서 1972년 안수집사 직분을 받았고 교회 출판부에서 꾸준히 활동했다. 대외적으로는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총무직도 맡았다. 그 덕분에 나는 세계성서공회와 세계CBMC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는 영광을 얻게 됐다.
30대 초반의 평신도가 한국성서공회 대표로 가게 된 것은 한국 교계에서 인정을 받은 셈인데 지금 돌이켜봐도 개인적으로 큰 보람이고 영광이었다.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열린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홍콩과 인도를 거쳐 힘든 여행을 했지만 그때 나는 세계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만나 많이 대화하면서 견문을 크게 넓혔다.
의미로 볼 때 세계CBMC 총회 참가는 그 이상이었다. 나는 미국 포틀랜드에서 열린 총회에 참석하면서 CBMC의 운영과 조직에 대한 식견을 얻었다. 이를 밑천 삼아 이후 한국CBMC 조직화에 박차를 가하게 됐고 그것이 오늘날 한국CBMC의 초석이 됐다.
지난 18일부터 20일까지 강원도 평창에서 열린 제30차 한국CBMC 전국대회에 참석하니 그때의 일들이 떠오르면서 감회가 새로웠다. 당시 한국CBMC의 기반을 닦기 위해 애썼던 인물들 중 최창근 강민구씨만 노구를 이끌고 참석했을 뿐 황성수 김인득 최태섭 정창성씨 등은 모두 고인이 됐다.
나는 세계성서공회와 세계CBMC 총회에 참가한 것을 내 신앙생활의 훈장으로 여기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 위치와 신분이 달라지진 않았지만 ‘나도 조금이나마 하나님의 일을 했다’고 자위하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이다.
좌우간 이처럼 내가 주인공이 된 극이 복잡하게 얽히고 있는 와중에 무대 뒤쪽에서는 또 하나의 새로운 극을 위한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세계성서공회와 세계CBMC 총회 참가,무역회사 설립을 위한 정지작업 등으로 무려 2개월여에 걸친 장기 외유중에 ‘폴 마이어’와의 조우가 이뤄진 것이다. 이는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인간개발연구원 설립의 단초가 되는 ‘대사건’이다.
미국에서 무역업 정지작업이 국내 정치상황 때문에 수포로 돌아간 뒤 나는 피츠버그로 가서 ‘심리학연구소’를 둘러봤다. 그곳에서 비정상적인 사람들을 고쳐가는 과정 등을 보면서 인간 내면의 복잡하고 미묘한 여러 문제,인간의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문제 등 다양한 인간의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됐다.
그런 다음 폴 마이어를 찾아가 만났다. 그때의 감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미 명지대 교수 시절 그의 저서를 읽고 큰 충격을 받았던 나는 그를 찾아가 그가 하는 일과 비전을 알고는 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여러 가지 자료를 챙겼다. 당시에는 그 만남이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몰랐지만 그 만남은 영속적으로 나의 사상과 행동,사업 등에 지침이 됐다.
이처럼 긴박하게 이어지던 하나의 막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서 내 인생 무대의 중반에 서서히 새로운 막이 올려지고 있었다.
정리=정수익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