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많은 사람의 회고록이나 자서전 등에서 자신들의 인생을 몇 개의 시기로 구분하는 것을 보아왔다. 나같은 사람이야 감히 그런 거창한 것을 쓸 엄두도 못내고 있지만 이번 연재를 하면서 내게도 인간개발연구원을 운영하기 전과 연구원 운영 이후로 뚜렷한 경계선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하나님이 역사하고 주관하신 내 인생은 역경(逆境)과 순경(順境)이 끊임없이 교차하면서 이어져 왔다. 그런 가운데서도 운동경기에서 전반전과 후반전이 있듯이 내 인생의 두 시기가 너무도 확연히 구분됨을 새롭게 느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지금까지 말해온 것이 인생의 전반전이었다면 지금부터는 후반전에 들어간다. 그런데 이 시점부터는 조심스러움이 앞선다. 전반전에선 지극히 사적인 줄거리를 듬성듬성 말하면서 별 부담을 못 느꼈지만 후반전에는 작고했거나 생존한 숱한 인물들과의 연관 속에서 이야기를 진행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거기다 후반전은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내게 있어 인간개발연구원은 천명(天命)이자 숙명(宿命)이 아닌가 한다. 언제인지 모르게 인간의 문제에 대한 탐구심이 발동한 이후부터 그 문제는 항상 내 머릿속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내 생활을 지배해온 것이다.
인간의 문제를 석사학위 논문 소재로 택한 것에서부터 폴 마이어의 저서에 충격을 받고 미국에서 그를 만난 일,‘KMI’라는 회사 운영에서 인간의 문제를 절감한 일,개념조차 생소한 ‘인간개발’이란 낱말을 떠올린 일,쫓기듯이 연구원을 설립하고 이후 29년간 잠시도 쉬지 않고 연구모임을 열어온 과정 등 모든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고서야 이루어질 수 없는 일들이다.
특히 지금까지 1315회를 기록한 ‘인간개발 경영자연구회’ 모임은 1979년 12·12 군사쿠데타 당일에도 열리는 등 긴박하고 위급한 상황에서도 한번도 빠뜨리지 않았다. 모임 때마다 내가 직접 강연자와 주제를 선정하고 토의를 진행했다. 개인으로서 정말 큰 보람이 아닐 수 없다.
그외에도 연구회의 업적은 굉장히 많다. 개인의 자랑같아 일일이 열거하기가 쑥스럽지만 지금까지의 참석자들 면면만 봐도 그 무게와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경제계는 말할 것도 없고 학계 정계 관계 언론계 종교계 등 각계의 숱한 ‘거물’들이 이 모임을 거쳐 갔다.
단적인 예로 1980년 정치적으로 아주 민감했던 시기에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씨 등 이른바 3김씨가 차례로 나와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밝혔다. 또 한때 전설적인 기업경영자로 여겨졌던 현대와 대우그룹의 설립자 정주영 김우중씨를 비롯한 많은 기업인도 이 모임에 나와 자신들의 인생관과 국가관,기업관 등을 토로하기도 했다.
만약 공정성이 결여됐거나 중량감을 인정받지 못했다면 이런 사람들이 연구회에 나오기나 했겠는가. 더구나 1315회로 이어지면서 한 주도 거른 적이 없다는 게 나를 비롯한 연구원 관계자들의 열성과 노력은 차치하고서라도 충분한 명분이 있었다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나는 2001년 제11대 회장으로 취임했지만 그 이전에는 1975년 설립 때부터 줄곧 원장으로서 일선 실무를 총지휘했다. 내 이전에는 박동묘 전 농림부장관(초대) 주원 전 건교부장관(2∼4대) 최형섭 전 과기처장관(5대) 이한빈 전 부총리(6대) 이규호 전 통일원장관(7대) 최창락 전 동자부장관(8∼10대) 등이 회장으로 재임했다. 조순 전 부총리는 2001년부터 명예회장을 맡고 있다.
현재 연구원의 주요 사업은 연구회 운영 외에 밀레니엄 경영자포럼,지방자치아카데미,자기주도리더십프로그램(LMI),인재개발연수프로그램,글로벌 코리안 네트워크 등이다. 최근에는 ‘2000 협동인구지원사업 특별정책과제 연구계획’을 세워 연구해 나가고 있다.
현재 원장은 양병무(경제학) 박사로 한국개발원 주임연구원,미국 이스트웨스트센터 연구위원,경총 노동경제연구원 부원장,한국리더십학회 부회장 등을 맡고 있으며 무려 23권의 저서를 낸 분이다. 최근엔 ‘감자탕교회 이야기’로 기독교계에 새 바람을 일으키기도 했다.
정리=정수익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