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강의는 이어졌다. “미친개에 물린 사람, 목을 맨 며느리, 하고 많은 사연으로 세상을 등지려는 사람들을 살려내는 일을 계속했다.” 이야기는 그칠 줄을 모른다. “미친놈 소리도 들을 만치 들었다. 조선인에게 행패부린 일본인 아이 15명을 두들겨 팬 일이 있고 부터는 고향을 떠나 압록강, 만주 등지에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하게 되었다.” 오늘의 강사 “내 안의 의사를 깨워라.” 김학림 선생의 할아버지에 대한 지난 이야기였다.
“함경도 흥원에서 태어난 할아버지 인산(仁山) 김일훈 조부께서는 7살 어린 나이 때부터 병명조차 모르고 죽어가는 이웃의 불치, 난치병을 치료하기 시작했습니다. 독사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에게 마른 명태(黃太) 다섯 마리를 달여 먹이도록 했는데 후유증 없이 깨끗이 낳았다.”고도 했다. 지금 함양 지리산 자락 해발 500미터 높은 터에 공장을 차리고 공기 맑은 언덕에 수련장도 지어 후학들을 기르고 있었다.
우리 인간개발원 회원은 현장 교육차 이곳으로 찾아갔다. 사방을 둘러선 푸른 수목들, 발아래 멀리 내려다보이는 실타래 같은 하얀 냇물, 1900m의 천왕봉, 그 어느 한 곳에서도 눈을 뗄 수가 없는 풍광이었다. 지리산의 지난날의 가슴 아픈 흔적도 어언 흘러간 옛 이야기 뿐이었다. 할아버지 용상을 그대로 빼어 닮은 듯 자애로움과 하얀 턱수염, 세련미 넘친 온화함, 연분홍색 한복이 그렇게도 어울릴 수가 없었다. 어딘지 속세를 떠난 산사의 철인 같은 느낌도 들었다.
우리를 아침부터 기다렸던 그는 손수 하나하나 짚어가며 지난 날 선대의 발자취를 마치 전문 해설가처럼 이야기 했다. “죽염(竹鹽)”은 서해안 바닷물로 만들어진 굵은 소금을 3년 이상 자란 왕대나무 통에 넣고 센 불에 아홉 번 이상 구워낸다. 한 쪽을 뚫은 마디사이에 천일염을 단단히 집어넣고는 진흙을 반죽하여 입구를 막고 소나무 장작을 1300도 이상의 센 불을 반복하여 아홉 번이나 굽는다. 그의 진지한 설명은 마치 그 옛날이야기 듣는 것만 같았다.
그의 막힘없는 화술은 분명 지난날 할아버지를 닮은 듯 했다. 무엇보다도 힘들었던 것은 이 민간치료요법을 세상에 알리려고 애썼으나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저 산골 털보는 어느 사이비 종교의 교주라고까지 저들끼리 이야기하며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한 기업가의 창업은 가슴 아린 숨은 이야기가 쌓여 있었다. 매사가 그러하듯 초심의 개척 그 길은 험하고 눈물겨웠다. 사람들은 이 발명 죽염을 알아주려하지 않아 그는 끝내 내가 기자가 되어 이것을 온 세상에 글로 써서 알리기로 작심했다. 이렇게 3대를 이은 성공 스토리는 참으로 감동의 연속이었다.
우리들 인간개발원은 매주 목요일 아침 7시에 시내 롯데호텔 볼룸에 모여서 경영연구회를 이어 온지도 어언 38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익힌 학문을 기업 현장을 찾아가 이론과 실제를 고루 소화시키는 살아있는 교육 집단이다. 지난 어느 해는 저 멀리 중동 두바이까지 가서 세계 최고 높이의 빌딩 건축 현장도 찾아갔다. 사막의 나라에서 한국의 삼성 기술이 일궈낸 쾌거였다. 하늘을 치솟는 건설현장을 직접 내 눈으로 보고 들었다. 명실공히 오감으로 익히는 산교육이었다. 그리하여 ‘찾아가는 CEO 교실’이라는 창의적인 이름 아래 지성만이 아니라 감성, 그리고 영성까지도 터치하여 지혜 있는 가슴 열린 공부를 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회원마다 아침형 인간으로 평생을 새벽 미명을 명상하며 살아왔다. 그리하여 시간을 무엇보다 황금 다루듯 중시했다. 이날도 아침 6시경 차 속에서 김밥으로 아침을 때웠다. 달리는 버스 속에서 황금 같은 시간을 그냥 보낼 리가 없었다. ‘움직이는 교실’이라는 말이 있듯이, 뉴욕에서는 출퇴근 시간을 어느 차 속에서 강의가 이루어진다고 했다. “시간을 어떻게 고객에게 더 많이 돌려주느냐가 현대기업의 최상 서비스입니다.” 어느 강사의 말이 기억났다. 나는 이렇게 짧은 이야기를 화두로 삼았다. 반기문 사무총장의 서울 평화상 수상식에서였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태풍 몇 개/ 벼락 몇 개/’ 강창희 국회의장이 지난해 유엔사무총장 관저를 찾아갔을 때 벽에 걸린 강석주의 시 ‘대추 한 알’이었다. 이어서 최수종이 주연한 영화 ‘철가방 우수씨’ 감상을 이야기 했다. 겨우 70만원 월급으로 자장면 배달하던 그가 자기와 같은 고아 5명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오토바이를 타고 자장면 배달을 하다가 그만 골목에서 갑자기 튀어 나오던 어느 승용차에 치어 생명을 잃은 실화를 이야기 했다. 한 푼의 출연료도 없는 재능 기부였습니다. 젊은 최수종, 그도 한 때 아버지가 갑자기 사망하자 유학길을 접고 귀국한 후 집도 없어 노숙한 고아 같은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실한 그는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숨은 많은 고통을 이겨내고 오늘의 국민 배우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최수종도 자장면 주인공 김우수씨도 장기기증까지 서약한 천사 같은 사려 깊은 사람들입니다.
김학림 회장의 창업 정신, 그리고 두 젊은이의 이웃사랑 결단은 우리에게 무언의 독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한한 우리 인생, 우리는 지금 이 시각도 그 종착역을 달리고 있습니다. 배움은 행함이 있을 때 그 가치는 빛납니다. 산수의 고개를 넘어서고야 철이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우리 동족, 시베리아 고려인 젊은이들은 영하 40도의 추위 속에 이 시각도 떨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식들입니다. 인간개발원은 일찍이 그들을 따듯이 보듬어 주고 있습니다. 최재형 장학회는 이렇게 태어났습니다. 촉촉이 내리던 새벽 가을비는 어느덧 멈추고 차창을 비비고 아침 햇빛이 화사하게 스며들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