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1월 10일 (월) 17:15
경대·참빗등 선물하면 외국CEO들 좋아해요
[조선일보 이경은 기자] 대기업 회장이 ‘규방(閨房)용품’을 수집한다고 하면 호사가나 재력가의 취미 정도로 가볍게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코리아나화장품 유상옥(兪相玉·70) 회장에겐 ‘규방용품’은 해외 최고경영자(CEO)와 교류하고 해외 시장을 뚫는 중요한 비즈니스 코드다.
“외국에선 비즈니스 파트너를 찾을 때, 그 회사 CEO가 전통 문화를 이해하고 있는지 아닌지부터 봅니다. 자국 문화를 잘 알지 못하면 다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도 소홀할 테니 비즈니스 파트너로는 자격 미달이라는 거죠.”
80년대 초반, 유 회장은 미국의 유명 화장품 업체인 ‘엘리자베스 아덴’ 뉴욕 본사를 방문했다. 그러나 아덴의 CEO는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유 회장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한국 여성의 전통적인 화장법과 화장 용구에 관해 얘기해줬어요. 선물로 가지고 간 분수기(粉水器)도 함께 보여줬죠. 그랬더니 태도가 달라지는 겁니다. ‘자기 문화에 대한 안목이 있는 CEO라면 함께 사업을 해도 괜찮겠다’는 거였죠. 기술 제휴에 성공한 건 물론입니다.”
해외 CEO와 친분을 쌓을 때도 규방용품은 한몫을 톡톡히 한다. 유 회장이 외국인 CEO에게 주는 선물은 주로 분합, 거울 등 옛 화장용구와 여성들의 삶과 관련 있는 그림이다.
유 회장이 독일의 화장품 업체인 ‘웰라’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사장 사무실에는 전 세계 각 나라의 화장용품이 진열돼 있었다. 그런데 유독 한국 문화재만 놓여 있지 않았다. 유 회장은 귀국한뒤 경대(鏡臺)와 토기를 사서 보냈고 웰라 사장은 뜻밖의 선물에 무척 고마워했다. 유 회장은 “기술 제휴는 오래전에 끝났지만, 웰라 사장과는 아직도 연하장을 주고받을 만큼 꾸준한 교류가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유 회장이 지난 20여년간 비즈니스와 사교를 위해 발품을 팔며 모은 구리거울, 참빗, 비녀, 분수기 등 우리의 옛 규방용품은 5000점이 넘는다. 선사시대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시대도 다양하다. 유 회장의 수집품은 오는 20일 문을 여는 신사동의 화장품 박물관 ‘스페이스씨’에서 처음으로 세상 빛을 본다.
(이경은기자 [email protect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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