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눈물
성원교역(주) 김창송
2013. 8. 29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는 3층 구석진 자리까지 가득히 관람객으로 메웠다. ‘파독派獨 50주년 기념 음악회’의 밤이다.
반세기전 1963년 12월 21일 겨울바람이 유난히 세차게 몰아치던 날 123명의 젊은이들이 외화벌이를 위해 김포공항을 떠났다.
그들은 독일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첫 삽을 뜨기 위해 광산으로 날아갔으니 이제 그날로부터 50주년이 되는 이 날을 기념하여 이렇게 모였다. 사회자 아나운서의 까랑까랑한 소리가 장내를 숙연하게 한다.
“당신의 땀, 눈물로 일군 대한민국 그 헌신을 빛내려 합니다.” 이렇게 큰 자막으로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8천여 명의 광부와 간호인력 1만여 명은 가난한 대한민국을 뒤로하고 이렇게 낯선 땅으로 떠났다. 그래도 약간의 희망을 안고 갔으나 첫날밤부터 고향집이 그립고 눈물로 밤을 새기 시작했다.
지하 3000미터 막장에서 땀과 탄가루를 뒤집어쓰고 자기 몸만큼 무거운 동발을 쉼 없이 뽑고 또 세워야 했다. 허리가 가는 한국인은 외지인의 절반체중으로 그들과 함께 일하려니 힘이 겨워 쓰러지기도 했다. “이것은 목숨을 건 사투였습니다.”라고 회고하는 그들은 진정 고향의 부모님과 동생들을 위한 희생의 제물이었다. 이렇게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그곳으로 떠나게 되었다. 500명을 모집하는데 무려 5만 명 가까운 지원자가 있었고 그 속에는 대개가 고등교육을 받은 학사를 비롯하여 많은 지식인들이었다. 그 뒤로 이어서 간호사와 간호조무사들도 역시 치열한 경쟁을 뚫고 고향을 떠났다.
아침마다 인사말은 바로 “글뢰아우프! 독일어로 살아서 돌아오라.”라는 뜻이라고 했다.
그 어느 날 박정희 대통령은 독일의 라인 강의 기적을 알아보기 위해 그곳으로 떠났다. 사실은 독일에서 우리나라 5개년 경제개발을 위해 당시 외화유입이 절대 필요하던 때였다. 그곳을 찾았을 때 파독광부를 격려하는 자리에서였다. 지친 탄가루 속에 하얀 눈동자만 반짝이는 우리의 젊은이들의 지친 모습을 보는 순간 대통령 내외는 목이 메어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이 낯선 남의 땅에서 피땀 흘리는 자식 같은 젊은이들을 대하는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도 처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대통령의 눈물은 우리 모두의 눈물이었다.
세 시간 가까이 진행되는 위로의 음악회는 첼로 정명화의 오페라 (탄호이저) 서곡으로부터 시작되어 많은 분들이 출연해 주었다.
나는 무대 앞에 앉아서 보고 있노라니 지난 날 독일 광부로 다녀온 지인 K형이 문득 떠올랐다. 어느 날 신문 광고를 보고는 결국 한 숨 쉬며 그 탄광 길을 택했다. 그는 말이 적었다. 묵묵히 4년이란 긴 세월을 마치 두더지 같이 햇빛 없는 땅 굴 속에서 보냈다. 드디어 무사히 만기를 채우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곳에서 다행히 한국인 간호사와 결혼까지 하였다. 그리고는 피땀으로 모은 돈으로 한식당을 차렸다.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맛있는 곳이라는 입소문이 파다하면서 사업도 잘 되었다. 그 어느 날은 그 곳 시장님도 문전에서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다가 점심을 먹고 갔다는 소문도 퍼졌다. 그는 이국땅에서의 넓은 세계를 보고 온 그는 오늘의 그 성공의 씨앗이 되었다며 울먹였다.
어느 날 우리 회사 사장이 비행기 타고 일본으로 출장 가는 모습을 보고, 비행기 타는 것이 얼마나 부러운지 몰랐다고 했다. 젊은 날의 꿈이 비행기 타기위해 간 곳이 탄광이라 했다. 고생 끝에 낙이 있다 했던가. K형은 지금은 남해 독일마을에서 노후를 즐기고 있다.
파독 근로자 기념관에는 그 때 광산에서 쓰던 때 묻은 노란 장화, 오렌지색감의 낡은 광부복, 물통, 그리고 빨간 헬멧 등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고향의 어머님께 써 보낸 깨알 같은 편지들이 가슴을 먹먹하게 울렸다. 안내원 할아버지도 지옥 같은 그곳에서 4년의 세월을 보냈다며 말을 잇지 못한다. 은발의 주름진 머리카락이 지난 사연을 대변하고 있었다.
“고국의 목소리도 찾아갑니다.” 김상희, 장사익 등 그 때 그들을 위로하러 독일 현지로 떠났다. 우리는 어느 새 이렇게 아픔을 나누는 형제, 자매들이 되었다. 나는 광부, 간호사 못지않은 눈물을 함께 흘린 그 때 우리 세대들도 그들과 함께 대통령의 그 때의 눈물을 닦아 드려야 하겠다. 그들이야 말로 가시밭길을 닦아 놓아준 우리의 선구자 들이었다. 이 밤의 마감을 장식한 소리꾼 장사익의 ‘아버지’의 구슬픈 가락이 귓전에서 맴돈다.
“산 설고, 물 설고 낯도 선 땅에/ 아버지 모셔드리고 떠나온 날 밤/ 얘야! 문 열어라/ 아버지 목소리 들린 때마다/ 세상의 문을 열게 되었고.”
늦은 밤, 콘서트홀 앞마당에는 젊은이들이 쌍쌍이 거닐고 있다. 분수대에서 뿜어 오르는 그 활력은 우리의 내일을 보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