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디플로머시』 창간호左와 반기문 총장의 금의환향을 다룬 2008년 7월호.
‘식인종 부락에 떨어뜨려 놔도 추장이 되어 돌아올 놈’.
흔히 수완 좋은 친구를 일컬을 때 종종 등장하는 비유다. 물론 이때 쓰는 ‘놈’자는 욕이 아니라 기막힐 정도란 뜻의 영탄사이자 때로는 부러워서, 또 어떤 때는 기특해서 바치는(?) 찬사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 낸다는 의미에서다. 칭찬의 의미로 국한한다면 영문으로 된 외교전문 월간지 『Diplomacy(디플로머시)』의 임덕규(73) 회장이야말로 딱 그런 사람이다. 영어로 원고를 쓸 수 있는 사람이 고작 한 손으로 꼽을 정도여서 영문 월간지가 전무하던 1975년 『디플로머시』를 창간했다는 것도 그렇거니와, 그동안 숱한 역경을 겪으면서도 외교란 특수 분야를 대상으로 34년째 건재시키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그렇다. 여기에다 전 세계를 통틀어 유일하게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표지인물을 각국의 대통령이나 왕, 총리 등 정상들로만 채워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더 그렇다.
30여 년 동안 100여 국가를 누비며 각국의 대통령과 왕·총리 등을 인터뷰해 온 임덕규 회장이 “요즘은 각국 지도자들로부터 오히려 ‘훌륭한 지도자가 되는 법’에 대해 인터뷰를 받는다”며 웃고 있다. [김상선 기자]
지금이야 세계 13위의 경제대국이니 뭐니 해서 우리나라의 위상이 한껏 높아졌지만 당시만 해도 보잘것없는 ‘동방의 소국’이 아니던가. 아무리 표지인물이라도 그런 나라에서 만드는 잡지에 외국의 실질적인 지도자를 모신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그건 불가능에 가까웠을 터. 하지만 그는 해냈다. 그리고 지금도 세계 잡지사(史)에 기록될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충남 논산이 고향인 그가 『디플로머시』를 만들게 된 것은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2대 외무장관과 유엔대사를 지낸 임병직 박사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됐다. 60년 동국대 법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던 63년 집안 아저씨뻘인 임 박사가 귀국하자 자진해 시중을 들기 시작, 10년간 개인적으로 보좌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윤치영 박사, 이범석 장군, 임영신 여사 등 당대의 쟁쟁한 인사들을 알게 됐고, 이들로부터 나라 사랑을 배울 수 있었다. 임 박사가 인도 대사로 있는 동안 ‘한국·인도 친선협회’를 만들어 간사로 활동하면서 국제적인 외교를 경험하기도 한 그는 임 박사가 72년 뮌헨 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을 알리기 위해 예술단을 이끌고 유럽 순방에 나서기 직전 당부를 듣는다.
“앞으로 먹고 살 생각만 하지 말고 영어로 잡지를 만들어 미국 사람들을 설득하면 국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1975년 『디플로머시』 창간호左와 반기문 총장의 금의환향을 다룬 2008년 7월호.
하늘 같은 어른의 말씀인지라 하겠노라 대답부터 했지만 막막했다. 잡지를 만들어 보길 했나, 영어에 능통하길 하나, 그렇다고 돈이나 많나…. 하지만 모든 걸 다 바쳐가며 독립운동을 한 어르신들을 생각하니 못해 내면 죄인이 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68~71년 신아일보 논설위원과 동화통신 출판부국장, 논설위원을 해본 터라 배짱도 생겨났다. 까짓 꺼! 전화를 잡혀 마련한 300만원으로 서울 무교동에 손바닥만 한 사무실부터 얻었다. 동지라곤 동화통신에서 사진부 차장으로 함께 일했던 백남식(지금은 세계적인 사진작가로 활동 중이다)씨뿐. 둘이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 짜내길 3년여. 마침내 75년 8월 창간호를 낼 수 있었다. 자금은 집을 담보로 충당했다. 창간호의 커버스토리는 한·미관계로 잡았다. 표지엔 포드 대통령 가족사진을 싣고 성조기 변천사, 역대 미국 대통령의 친필 서명, 역대 주한 미국 대사 사진 등으로 특집을 꾸몄다.
“주위에선 미친 짓이라며 극구 말렸습니다. 하지만 막상 창간호가 나오니 ‘된장 냄새 안 나게 잘 만들었다’고 격려가 쏟아지더군요.”
용기가 절로 났다. 죽자 살자 뛰어도 힘이 안 들었다. 아침 끼니 거르기를 밥 먹듯 했다. 광고를 얻기 위해 기업체 사장들의 출근길을 지키느라 그랬다. 이런 속내도 모르고 곧 문닫을 줄 알았던 게 계속 나오니 중앙정보부 기관지다, 심지어 CIA 끄나풀이다 하는 소문이 나돌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럭저럭 4년쯤 버텨내자 어느 정도 명성도 생기고 자리가 잡혔다. 이렇게 된 데는 ‘장점 찾아 삼만 리’ ‘만국 만민 평등’을 내세운 전략이 주효했다.
창간호 이래 지금까지 『디플로머시』는 왕이나 대통령, 총리 380명을 표지인물로 ‘모셨다’. 임 회장은 이 가운데 330여 명을 직접 인터뷰했다. 이를 위해 5대양 6대주를 쏘다녀야 했고, 방한하는 지도자들은 서울에서 만나곤 했다. 미국, 중국, 일본, 영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 대국들은 물론 피지, 지부티, 부르키나파소, 베냉 등 이름조차 낯선 나라에 이르기까지 대상국만 100개 나라가 넘는다.
서울 무교동 삼덕빌딩 9층에 있는 『디플로머시』 회장실에는 그가 30여 년 동안 만난 세계 지도자들의 사진으로 벽의 한 면이 온통 도배질 돼있다. 레이건, 아버지 부시, 장쩌민, 후진타오, 후쿠다, 나카소네, 고르바초프, 대처, 블레어, 빌리브란트, 트뤼도, 인디라 간디, 바웬사, 만델라, 라빈, 마하티르, 아키노, 리덩후이, 발트하임, 케야르, 부트로스 갈리, 코피아난, 토인비, 린위탕….
이만하면 임 회장을 ‘추장…’이라 부를 만하지 않나? 사실 그와 한두 시간만 얘기를 나눠보면 금세 왜 그를 그렇게 얘기해도 되는지 쉽게 요해된다. 이삼십 년 전 시각까지 되뇌는 기억력을 바탕으로 한 해박한 지식 하며, 상황마다 재빠르게 대처하는 기지와 순발력, 어려움을 굽힐 줄 모르고 맞서는 용기와 담력, 방금 전까지의 적을 단숨에 동지로 만들어 버리는 타고난 친화력과 ‘구라’ 등등. 『디플로머시』를 바탕으로 11대 국회의원을 지낸 거나 86~88년 세계국제법협회(ILA) 회장을 역임한 거나 다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그는 손사래를 친다.
“단 한 번도 제가 남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누구라도 반드시 해야 할 것을 제가 맡았기에 어떻게 해서든지 해내야만 한다는 일념으로 지금까지 버텨온 것뿐입니다.”
현재 『디플로머시』는 세계를 망라해 500여 명의 어드바이서(adviser)가 있다. 그동안 임 회장이 만났던 각국의 정상과 장관, 유엔을 비롯한 APEC·EU·아세안 등 국제기구 관계자, 유명 대학총장 및 노벨상 수상자를 포함한 다양한 분야의 석학, 대기업 총수 등으로 수시로 자문에 응하거나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어떤 때는 기고를 통해 제작에 직접 참여하기도 한다. 오늘날 『디플로머시』가 정치·외교·경제 분야의 세계적 월간지로 부상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임 회장은 이같이 폭넓고 다양한 인맥으로 서울 외교가는 물론 유엔 등 국제 외교무대에서 유명 인사가 된 지 오래다. 그는 서울에 앉아서도 이 같은 안테나를 가동해 세계 외교의 흐름을 한눈에 꿰고 나름대로 시의적절한 진단과 처방을 내놓아 직업외교관들도 혀를 내두르곤 한다. 잡지를 만들면서 나라를 위해 다양한 민간 외교활동을 마다하지 않는다. 세계 외교관들 사이에 ‘닥터 림’으로 통하는 그가 국내에서 ‘무관의 특명전권대사’로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외교가엔 널리 알려진 얘기지만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탄생엔 임 회장의 막후 활동이 큰 몫을 했다. 2004년 초 외무장관이 되자마자 유엔 사무총장에 출마할 것을 권유한 이도 그였고, 주한 외국 대사들과 유엔 주재 각국 대사들을 상대로 ‘반사모’를 조직해 선거운동을 한 것도 그였다. 그는 미국이 나토 사령부를 폴란드로 옮기기 위해 폴란드 대통령을 염두에 두고 “유엔 사무총장이 아시아에서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하자 공개적으로 “미국은 아시아에 등을 돌리려는가”하고 따져 입장 변경을 이끌어내는가 하면 개인적 친분을 이용해 폴란드 대통령으로 하여금 출마를 포기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다. 그는 다섯 시간의 인터뷰 중 절반을 ‘반 총장 만들기’ 비사(秘史)로 채울 만큼 별의별 수단과 지략을 동원했다. 세 차례의 예비투표에서 1등 한 것을 지켜본 뒤 병으로 쓰러질 때까지 선거운동을 했으니까. 오죽했으면 반 총장이 당선 다음 날 바로 문병을 갔을까.
임 회장은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줄곧 북한 편만 들어오던 알제리의 부테플리카 대통령의 마음을 돌려놓은 공로자이기도 하다. 2001년 12월 알제리에서 대통령을 인터뷰하면서였다. 대통령은 “프랑스와의 독립전쟁 때 유일하게 북한이 도와줬다”며 “그래서 북한을 도왔으며 김일성과 친했고, 이어 김정일과도 친하다”고 했다. 이에 임 회장은 “좋은 얘기”라고 반기며 “한국한테는 김정일과 친한 사람이 필요하니 대통령께서 남북한 간 가교 역할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 알제리의 경제 발전을 위해 한국 기업들이 돕도록 주선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자 대통령은 흔쾌히 “좋다”고 화답했다. 임 회장은 귀국 후 부테플리카 대통령의 국빈방문을 주선했고, 대통령은 2003년 12월 방한했다.
임 회장만큼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 변화를 몸으로 체험한 이도 드물다. 그는 “70년대는 한국을 설명하느라 애를 먹었는데 90년대부터는 오히려 외국 지도자들이 어떻게 하면 한국처럼 될 수 있느냐며 조언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말한다. 특히 그는 “세계 200여 국가 중 170여 나라가 한국을 모델로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며 “덕분에 『디플로머시』의 주가도 올라 주간지를 만들어도 될 정도로 각국으로부터 자기네 지도자를 인터뷰해 달라는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고 즐거워한다.
임 회장은 “천년 혹은 만년 뒤 지구상에 가장 많이 남아있을 책은 단연 『디플로머시』일 것”이라고 장담한다. 표지인물이 각국의 최고지도자들이니만치 기념관마다 보관될 것이기 때문이란 계산에서다. 그래서 그는 후세에도 부끄럽지 않을 잡지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갈수록 어깨가 무거워짐을 느낀다. 요즘도 새벽 6시면 어김없이 집을 나서 한국인보다 외국인을 더 많이 만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보다 나은 콘텐트를 만들어 내려는 ‘추장’다운 노력이다.
이만훈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