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우리금융 회장의 51년 금융인생 … ‘삶과 경영’ 제2화 연재 시작
“3연임 안 하겠다”하자 조석래 “무책임하다” 만류
최고경영자(CEO)들이 풀어내는 ‘삶과 경영’ 이야기, 그 두 번째 주인공은 윤병철(74·사진) 한국파이낸셜플래닝(FP)협회장입니다. 윤 회장은 국내 금융계를 대표하는 원로입니다. 그의 51년 금융인생을 따라 한국 금융, 그리고 한국 경제의 역사를 되짚어 봅니다.
무엇보다 그는 모범적인 승계 사례를 남긴 CEO다. 한국 금융사에 아주 드문 일이다. 하나은행장 임기를 두 번 끝낸 1997년, 스스로 물러나 후배들에게 길을 터줬다. 윤 회장은 “금융은 사람”이라고 늘 말한다. 금융계 종사자가 전문성과 윤리성을 갖추고 소비자의 이익을 보호할 때 금융이 본연의 사명을 다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 일흔이 넘은 나이지만 윤 회장은 여전히 호기심과 열정으로 가득하다. 지금도 스마트폰과 태블릿PC로 일정을 관리한다. 최근엔 페이스북 세계에 입문했다. 그는 “호기심을 갖고 끊임없이 배운다면 나이 80도 청춘”이라고 말한다.
한애란 기자<[email protected]>
“나는 당신 덕분에 즐겁고 보람차게 은행장 생활을 할 수 있었어요. 김승유 행장! 당신도 당신처럼 훌륭한 후계자를 키워서 은행장 직을 행복하게 마무리할 수 있기를 바라오.”
1997년 2월 26일. 내가 하나은행 최고경영자(CEO) 자리에서 물러나는 날이다. 퇴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반포 집을 떠나는 나의 마음은 마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듯 홀가분했다. 한국투자금융을 하나은행으로 전환시켜 은행장을 두 번 역임했다. 내 손때가 묻어 있는, 나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은행이다. 그럼에도 마음 편하게 은행장 자리에서 물러날 수 있었던 것은 김승유(현 하나금융지주 회장)라는 걸출한 후계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날 아침 나는 김승유 신임 행장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뜻을 표시하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기원했다. ‘부디 당신도 당신 같은 후계자를 만나는 행운을 얻게 되기를 바란다’라고.
집을 나서 을지로 입구 하나은행 본사 빌딩을 향해 한강변을 달리면서 바라본 서울의 하늘은 유난히 쾌청해 보였다. 하나은행장에 앞서 그 전신인 한국투자금융 사장도 두 번 했으니, CEO 생활만 벌써 12년이다. 1960년 농업은행(현 농협)의 행원으로 금융계에 발을 들여놓은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어느새 37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즐거웠던 일, 힘겨웠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1991년 7월 임직원 325명으로 시작한 은행이다. 6년 사이 임직원은 1600명으로 늘었고, 자산 규모도 1조5000억원에서 12조6000억원으로 불어났다.
은행 현관에 도착하니 직원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반가운 낯으로 나를 맞아 준다. 나도 떠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하긴 앞으로도 하나은행 회장으로 계속 출근하게 된다. 다만 은행장에게 조언만 하는 회장이다. 내가 그러길 원했다.
나는 김승유 행장에게 세 가지를 서면으로 약속하고 이를 지켰다. “첫째, 회장은 대표를 맡지 않는다. 하늘의 해는 하나만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 둘째, 회장이 은행에 대해 얘기할 때는 은행장을 통해서만 한다. 조직원들이 행장과 회장, 양쪽으로 줄을 서면 곤란하므로. 셋째, 그 외의 일은 은행에서 묻는 것에만 답을 한다. 고문 역할은 하지만 먼저 나서지 않는다.”
이취임식이 열리는 강당에 들어섰는데 이게 웬걸, 퇴임이란 문구가 없다. 직원들은 ‘행장-회장 취임식’이란 플래카드를 걸어놨다. 그래도 자리를 넘겨주는 것은 분명한데 뜻밖이었다. 세심하게 배려하는 직원들의 마음씨가 고마웠다.
은행장 퇴임사 겸 회장 취임사로 임직원들에게 당부했던 말은 아직도 생생하다. “하나은행은 민간의 힘으로 탄생한 은행입니다. 이런 ‘자주성’의 전통을 절대 잃어선 안 됩니다. 자주를 지키려면 자율성이 살아 꿈틀거려야 합니다…. 자주, 자율, 진취. 하나은행의 이 세 가지 정신을 굳건하게 이어나가기 바랍니다.”
하나은행의 정신이 부단히 이어졌으면 하는 소망에 내 나름의 ‘의식’도 준비했다. 검은 몽블랑 만년필에 나와 김승유 행장 이름을 나란히 새겼다. “중요한 계약에 서명할 땐 이걸로 하세요”라고 당부하면서 만년필을 건넸다. 그 뒤로도 ‘행장 만년필’이란 이름으로 대대로 내려오고 있다. 이후 김종열 행장, 김정태 행장에게까지 전해졌으니 어느새 4대째다.
“아니, 윤 행장. 어떻게 그렇게 무책임할 수가 있습니까.”
1997년 초 하나은행 주주총회를 앞두고 이사들을 방문해 사임의 뜻을 밝히고 양해를 구하러 다녔다. 조석래 효성그룹회장(당시 사외이사)을 찾아가 사임의사를 전했더니 깜짝 놀란 조 회장이 무책임하다고 따져 물었다.
“당신이 직접 은행을 만들자고 해서 우리가 동의하고 지원한 거요. 그런 은행이 성공할지 실패할지 아직 모르는데 여기서 당신이 그만둔다는 게 말이 됩니까.”
하나은행은 34개 시중은행 중 아직도 33번째의 작은 은행이었다. 당시 금융당국은 은행장의 3연임을 수용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3연임을 마다하고 행장이 스스로 물러난다니, 이사들로선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었을 게다. 그래도 나는 소신을 가지고 이사들을 설득했다.
“하나은행이란 이름은 평생 저와 함께 가는 겁니다. 앞으로도 회장으로서 책임을 다할 것입니다. 다만 한 차원 높은 은행의 발전을 위해선 이 시점에서 제가 물러나고 더 능력 있는 후임에게 길을 열어주는 것이 최상의 선택입니다.”
사실 2연임만 하고 물러나겠다는 결심은 진작부터 해왔다. 그만두기 2년 전, 그러니까 1995년쯤이었다. 85년 한국투자금융 사장을 맡은 뒤 CEO만 10년째 하고 있었다.
결재를 하다가 ‘그때 좀 더 심사숙고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후회가 들 때가 있었다. CEO로 10년을 살다 보니, 중요한 결정조차 일상사가 돼 버렸다. 매너리즘에 빠진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이제 물러날 때가 됐구나’ 하고 직감했다. 이대로 있으면 나는 편하지만 조직엔 좋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행엔 더 젊고 능력 있고 열정이 넘치는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했다.
막상 마음을 먹었지만, 실행에 옮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가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내와 자식들도 가장인 나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을 터다. 퇴임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이었다. 그래서 먼저 아내에게 운을 띄웠다. “이번 임기가 끝나면 은행장 그만둘 거요.”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입버릇처럼 얘기했다. 처음엔 ‘저 사람 무슨 기분 나쁜 일이 있나 보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눈치였다. 그런데 자꾸 반복해서 얘기하니까 아내도 비로소 진심이란 걸 느끼게 됐다. 그리고 내 뜻을 받아들였다. “그래요. 당신 뜻대로 하세요.”
임기를 1년쯤 남겨두고서는 은행 안에서도 그만두겠다는 얘기를 했다. 후계자로 마음에 뒀던 당시 김승유 전무에게도 “이번 임기를 마치면 나는 그만둔다”고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이것은 나 자신의 결정을 돌이킬 수 없도록 강제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사람 마음이라는 건 수시로 변한다. 오늘 이렇게 생각한 마음이 내일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다른 사람에게 그만두겠다고 공언함으로써 내 마음의 고삐를 더욱 확실하게 다잡았다.
그때만 해도 은행장 선임 때가 되면 청와대로 온갖 투서가 쏟아지는 등 분위기가 혼탁했다. 어느 조직이나 한 사람이 너무 오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갈등과 폐단이 생기게 마련이다. 난 그때나 지금이나 은행장은 두 번만 하고 물러나면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이 오래 리더를 맡다 보면 능력 있는 사람이 기회를 얻지 못하고 조직을 떠나는 일이 생길 수밖에 없다.
내 뜻대로 나는 은행장을 재임까지만 하고 회장으로 물러났다. 지금의 금융지주회사 회장과 달리 현업에서는 손떼고 자문 역할에 머무는 그런 회장 자리였다.
회장이 된 뒤 하는 일은 단순했다. 매주 화요일 김승유 행장과 차를 마시며 은행 돌아가는 얘기를 나눴다. 김 행장은 은행 관련 얘기를 자세하게 내게 전해줬고, 나의 의견도 구했다. 나는 “그건 참 잘했네” 또는 “이런 점도 봐야 하지 않겠어요”라면서 크고 작은 조언을 해줬다. 조언은 거기까지였다. 약속한 것을 철저히 지켰다. 나로선 오랜만에 큰 짐을 내려놓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윤병철 전 우리금융 회장
대담=김광기 선임기자, 정리=한애란 기자<[email protected]>
◆윤병철=경남 거제 출신으로 부산대 법대를 나왔다. 1960년 농업은행에 입사해 한국경제인협회(현 전경련)를 거쳐 국내 최초의 민간 금융회사인 한국개발금융의 창립 멤버로 참여했다. 82년 한국투자금융으로 자리를 옮긴 뒤엔 ‘독일 병정’이란 소리를 들으며 혁신활동을 펼쳐 업계 4위이던 회사를 2년여 만에 업계 1위로 만들었다. 2004년 우리금융지주 회장직에서 물러나면서 ‘스스로를 위해 돈 버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이를 지키고 있다. 저서로 하나은행 설립 과정을 담은 『하나가 없으면 둘도 없다』(1996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