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책상 위에는 크기가 각각 다른 몇 권의 책들이 동시에 열려져 있고 내용 모를 복사지들이 너저분하게 널려있다. 이것 저것을 한참 들여다보며 메모도 하고 밑줄도 친다.
이윽고 책은 책대로 복사지는 복사지대로 챙겨 책상 위를 정돈한다. 그리고 의자를 젖혀 친정을 한참 응시한 뒤 수첩(그보다는 책 두께에 가까운 대학 노트)을 뒤적인다. 그리고 전화.
“김교수님? 저 엠비씨 김 진희에요. 안녕하셨어요? 스케쥴에 변함없으시겠죠? 네 네. 그럼 그때 뵈요.
또 전화.
“부산 엠비씨죠? … 프로듀서 부탁해요! 안녕하세요? 저 서울 엠비씨 김 진희예요. 일전에 부탁 드렸던 동래 야유 사람들 약속 시간 잡혔어요? 그런데 말이죠. 사례금이 많지 않아서 어떡하죠? 아무튼 그때 내려가서 뵙죠.”
그 이후에도 전화는 계속된다. 좀처럼 전화를 버릴 것 같지 않다. 두 번째 통화부터는 슬그머니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아예 앉을 생각을 않는다. 벌써 열 통화를 넘고 있다.
김 진희. 교양 제작국 제작 위원. 그가 전화기를 붙들고 일어서서 통화하기 시작하면 그에게 일이 시작됐다는 신호다. 프로그램 구상 단계에서는 어슬렁어슬렁 커피를 뽑아 마시러 가거나 책을 쌓아놓고 읽거나 하지만 막상 구상이 끝나면 전화를 걸 때도 앉아있지 못한다. 여성 특유의 침착함과 잔잔함이 잘 유지되다가도 프로그램 오더가 떨어지고 녹화일정이 잡히면 손바닥 뒤집듯 분위기가 바뀌어버린다.
문화방송 프로듀서로 입사한 것이 1964년 3월, 입사 동기들은 부국장, 국장선에 물러 앉았지만 그는 아직 현장을 뛰고 있는 `행운아`다. 여성으로서는 최고참 프로듀서로서 `이름을 날리고` 있다. 그러나 최고 참이라는 타이틀은 그가 제작해 온 프로그램들을 보면 연륜이 실어다 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입사하고 처음 만들었던 프로그램은 「건강의 샘」. 의학 상식을 토대로 한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다. 그 후 1978년 2월 TV제작국으로 옮기기까지 그가 만들어낸 이름난 라디오 프로그램은 꼽기만 도 고역일 정도다.
전화로 인생 상담을 해줬던 「주부 휴게실」, 다큐멘터리 드라마 「절망은 없다」「전설따라 삼천리」「문예극장」 어린이 명작 드라마「무지개 마을」, 어린이 만화극「태권동자 마루치」, 청취자 참여 인생 상담 드라마「행복의 열쇠」, 인생 상담 드라마「가정법원」등등.
일곱 해나 계속했던 「절망은 없다」는 세미 다큐멘터리 드라마로 요즈음 MBC -TV에서 선보이는 「인간 시대」와 성격이 비슷했다. 그 프로그램을 제작하느라고 사람을 만나기 위해 일본까지 가는 등 5백 여명을 만났지만 지금은 한 사람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한다. 굳이 기억해 보길 강요했지만 결국 한 사람도 이름을 떠올리지 못했다.
“저는 완성된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아요. 웬일인지 모르겠어요.”
전파는 지워진다는 방송의 속성 때문일까, 방송에 살다 보니 그는 방송의 속성마저도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달려라 마루치 날아라 아라치…” 이렇게 시작되는 「태권동자 마루치」의 주제가는 요즈음 30대 초반에게는 널리 알려진 동요. 이 프로그램은 최초의 라디오 만화였다. 「행복의 열쇠」는 일종의 사이코 드라마로 당시로서는 새로운 분야였고.
“그러고 보니 내가 최초로 시작한 게 꽤 있죠? 식당 같으면 `원조 아무개`하고 간판이나 달았을 텐데.”
그는 「전설 따라 삼천리(1969년)」, 「절망은 없다(1972년)」,「무지개 마을(1975년)」로 한국방송대상 문화공보부 장관상을 세 번이나 받았다. 그리고 1976년에는 「행복의 열쇠」로 방송 윤리 위원회상을 받았다. 그의 수상경력은 TV로 옮긴 다음에도 이어진다. 세계 홍보회 날 공로상(1979년), 대통령 표창(1979년), 방송 심의 위원회상(1983년) 등.
뒤늦게 TV제작국으로 옮긴 뒤 그는 라디오 때와는 또 다른 열정으로 토크 쇼 「터놓고 이야기합시다」, 어린이 뮤지컬 「꽃나라 별나라」, 다큐멘터리「역사의 고향」, 그리고 특집 「한국의 얼굴 장승」, TV테마 에세이 「도깨비」등의 TV프로그램을 제작했다.
어린이 프로그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말하는 인형들은 그가 「꽃나라 별나라」에서 최초로 시작했던 작업이었다. 어린이 프로그램에선 코미디언, 탤런트, 가수 등을 출연시킬 수 없는 제작 조건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시도했던 것인데 뜻밖에 좋은 결과를 낳았던 셈이다.
「역사의 고향」에서 다루었던 주제들은 처용은 누구인가, 경주 남산 석불, 마의 태자의 길 1천 3백리, 만파식적. 중원 문화권, 원효대사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이렇게 이어지는 프로그램 제작을 통해 자신이 갖고 있는 관심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인간의 삶에 대한 본질을 어린이로부터 찾으려는 노력이 깊어졌고, 삶의 결과라고 할 문화에 대한 미시적 관찰은 한국 전통 민속의 이해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 두 가지에 대한 관심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요즈음 그가 제작하고 있는 프로그램은 영상 다큐멘터리 「겨레의 멋 – 탈」. 전국에 흩어져 있는 13개의 가면극들을 쫓아다니며, 미술품으로서의 가면과 전통 잇기로서의 가면극을 통해 겨레의 얼을 걸러내 보자는 작업이다. 이미 제작했던 장승, 도깨비 등과 맥락을 같이 하는 한국인의 얼굴 찾기 운동의 일환이다.
촬영 현장에서 만난 그의 모습은 사무실에서 보았던 모습과는 크게 달랐다. 일 욕심의 그림자가 드리워져서 밥 먹을 시간조차도 잊고 있었다.
촬영을 하던 정 치조 부장이 말을 건넨다.
“라보아점이 뭔지 아십니까?”
“……?”
“라면 보통으로 아침 겸 점심을 때운다는 겁니다. 김위원이 전에 했던 도깨비 촬영 때 오디오 맨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는 새벽 장면에서부터 밤중 장면까지, 박물관 진열장에서부터 산중 절터까지 샅샅이 뒤지는 까닭에 식당이 없는 곳이 많아서 아예 차 속에 컵라면을 박스 째 싣고 다닌다는 것.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부산까지 내려간 나를 그는 도무지 만나주지 않았다. 촬영 작업이 워낙 늦게 끝나기도 했지만, 인터뷰는 개인적인 일이니 촬영이 완전히 끝난 다음으로 미뤄 달라는 그의 결벽증 때문이었다.
서울로 돌아오기도 뭣해서 충무로, 마산으로 촬영 현장을 따라 다녔다. 촬영이 끝난 날 밤 10시 마산 산호동의 어느 다방에 마주 앉아 급한 대로 몇 마디 질문을 할 수 있었다.
-주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계시죠?
“네, 다큐멘터리도 여러 종류가 있겠습니다만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방송을 통한 전통 문화의 수용입니다. 우선 인식도를 높이기 위해 많이 보여주자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깊이 있는 분석을 소홀히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 고민입니다. 어쩌면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자체가 갖는 모순인지도 모르죠.”
-20년이 넘는 경력이신데, 그 동안의 경험으로 보아 나름대로의 방송관 같은 게 있을 법한데요.
“방송장이에게 관이 있다면 방송 그 자체가 관이겠지요. 모든 것은 항상 변하고 바뀝니다. 방송도 시대에 따라 변하고 바뀝니다. 방영했던 방송은 이미 늦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신이 바뀐다는 뜻은 아닙니다.
-방송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느끼는 것은 무엇보다도 물량 면에서도 부족하다는 겁니다. 다큐멘터리는 현장의 생명 음을 채록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므로 우선 시간이 충분해야 합니다. 더불어 급격히 쏟아져 들어오는 뉴미디어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겠지요.”
-회사 안에서 여성 동료들끼리 어떤 모임 같은 게 있습니까?
“없습니다. 기자, 프로듀서, 미술 디자이너 등 전문직만 20여명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요즈음은 결혼 후에도 직장 생활을 계속하는 여성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만나서 서로의 경험을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참, 결혼 문제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흔히 잡지 기사 식으로는 방송과 결혼했다는 표현이 어울릴듯합니다만.
“하하하, 미쳤습니까, 방송과 결혼하게? 세상에 일 때문에 결혼 안 한 사람이 어딨습니까, 일은 삶의 한 방편일 뿐이며, 결혼 또한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닙니다. 왜 결혼하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에게 나는 질문을 되돌려줍니다. 너는 왜 결혼했느냐고 말입니다. 스님, 수녀, 신부 등 좋은 방법으로 사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들에게는 왜 결혼 안 했느냐고 묻지 않더군요.…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어쩌다가 결혼 못한 건 아닙니다. 나는 다만 기획하지 않은 건 안 할 뿐입니다.
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화장기가 전혀 없었다. 원래 화장을 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작업이 있을 때는 얼굴을 자주 훔치는 버릇이 있어서 화장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화장도 곧잘 하고 모양도 내지만 10년 전에 샀던 하이힐이 아직 그대로 있으니 아무래도 남들만큼 모양내는 편이 아닐 것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취미가 있느냐는 질문에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없는 것 같다고 대답한다. 그런 걸 뭘 그렇게 생각하느냐니까 근사한 걸 하나 대려고 했다며 씩 웃는다. 일반인들이 알만한 친구가 있느냐는 질문에는 “모두가 다 친구이고 모두가 다 친구가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방송 얘기를 할 때는 필요이상으로 시간을 늘려주고, 방송과 관계없는 얘기를 할 때는 필요 이하로 시간을 잘라버렸다.
1936년생, 아버지는 천안의 갑부였고 어머니는 개성 호수돈 여자 고등학교 출신, 서울 명륜동에서 태어나 조양유치원, 교동 국민학교, 경기 여자 중학교를 나왔다. 중학교를 마칠 무렵 6?25가 터져 인천으로 피난, 박문 여자 고등학교를 다녔다. 감수성이 한창 예민했던 사춘기에 전쟁을 겪으면서 `나쁜 청소년 시절`을 보내야 했는데, 이때 신앙(카톨릭)을 가졌으며 지금도 여의도 상당에 나간다.
전쟁 때문에 스스로를 `로스트 제너레이션`으로 생각했으며, 이화 여자 대학교 국문학과를 1년 반쯤 다니다가 고려 대학교 국문학과 2학년으로 편입, 졸업했다. 이 무렵 유치원교사를 4년쯤 했고 고대에서는 연극반에 들었다. 탤런트 여운계와 「안티고네」에 출연했으나 배역은 신통치 않았고, 그 후 「리처드 3세」등 몇 편의 연극에 출연하기도.
이 때에 연극경험이 방송에도 활용되었고 「바리더기」란 작품으로 국립극장 장막 희곡에 당선, 극작가로 데뷔했다. 「바리더기」는 국립극단이 공연하였는데 `소외된 그룹에 대한 애정`으로 며칠 밤을 세워가며 썼던 작품. 그는 방송사에 근무하면서 고대 대학원에 진학, 7년 만에 신문방송학과를 마친 열성 학구파이기도 하다.
그는 파리에서 연극학 박사를 하고 온 여동생과 어머니, 이렇게 셋이서 여의도 20평짜리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