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묵을 통한 전통회화의 현대적 변주
가나아트는 한국화의 대가 소산 박대성(b. 1945) 화백의 개인전 <圓融원융 Infinite Interpenetration>을 선보인다. 가장 전통적인 소재와 기법을 통해 역설적으로 현대적 감각을 보여주는 박대성의 작품들은 한국화의 근본을 지키는 한편, 이를 현시대에 생동하는 그림으로 만들기 위한 작가의 꾸준한 조형적 시도의 결과물이다.
이번 전시는 평생을 글씨연습에 매진한 작가의 대담하면서도 치밀한 필선이 돋보이는 대표작 이외에도 작가 내면의 풍경을 통해 신라의 정신을 담아낸 신작들을 새롭게 공개한다. 예를 들어 가로8미터의 장대한 화폭에 눈 내린 불국사를 표현한 <불국설경>은 세필로 섬세하게 표현된 건축물과 화면을 가로지르는 소나무의 역동적인 구성을 담은 역작이다. 또한 도자기를 소재로 한 <고미古美 2> 연작은 담백한 미색으로 도자기에 담긴 정신성을 함축하고, 이에 여백과 글씨를 현대적 감각으로 더하였다.
지난 9월 터키 마르마라 대학 공화국 갤러리에서 열린 박대성의 개인전 <먹의 향기, 이스탄불을 담다>에는 수묵풍경 30여 점이 출품되어 현지 언론의 찬사를 받았다. 이번 전시는 이들 작품 가운데 일부를 국내에 처음 선보이는 동시에 전통과 현대, 동서양을 아우르는 작품세계를 통해서 박대성의 진면목을 느끼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작가 박대성의 일생과 예술적 고행
박대성은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으나 한국화의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수묵을 현대화한다는 점에서, 겸재謙齋에서 소정小亭과 청전靑田으로 이어지는 실경산수實景山水의 계보를 잇는 한국화의 거장으로 회자된다. 한국전쟁 당시 부모를 여의고 자신의 왼쪽 팔까지 잃는 아픔을 겼었지만, 그림이 좋았던 작가는 묵화墨花부터 고서古書에 이르기까지 독학으로 끊임없는 연습을 거듭하는 고행의 길을 걸었다. 붓을 들기 시작한10세 이후 초지일관 화업에만 정진한 그는 수묵을 점차 외면했던 한국화단의 흐름 속에서 끝까지 먹의 정신을 고수하였다.
천부적인 감각과 소재 선택의 탁월함으로 한국화의 경계를 끊임없이 확장시키며, 그는 수차례 국전에서 수상하였고, 중앙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차지하는 등 70년 대 동양화단에서 이변을 일으켰다. 사람의 발이 닫지 않은 오지로 화문기행을 다니고, 경주에서 독거생활을 하며 작업에 매진해온 그의 외골수와 같은 태도는 오히려 세상에 대한 통찰의 힘을 주었다. 다시 말해 작가적 삶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긴 그의 작품들은 어떠한 현상도 각각의 속성을 지닌 채, 동시에 서로 원만하게 조화를 이루는 ‘원융圓融’에 다다른다. 이번 전시의 제목이기도 한 <원융>은 이렇듯 시공간을 초월하며, 정신적 조화를 이루려는 작가의 노력과 상통한다. 거시적인 시각에서 대립되는 각각의 속성을 더 높은 차원에서 거대한 하나의 순환으로써 융합하는 일은 박대성이 일생 동안 작업을 통해 추구해 온 심미안과 다름이 없다.
동시대 미술계가 다시금 주목하는 ‘수묵’
한국화단에서 한국화는 서양화와의 구분이 모호할 만큼 재료나 소재 면에서 당대 미술계의 경향에 맞추어 진화해 온 면이 없지 않다. 이는 오히려 한국화의 입지를 약하게 하고, 사실상 전통의 맥을 잇기 어렵게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박대성은 현란한 색채가 아닌 먹의 고매한 빛깔과 서예를 통해 다진 견고한 필력을 통해 약동하는 생명력을 구현하였고, 궁극적으로 먹의 정신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획기적인 화면 구성과 과감한 먹의 사용은 현대적으로 해석된 수묵에 강인한 힘과 의지를 불어넣고 있다. 결국 박대성은 전통을 이어가면서도 이 시대와 함께 호흡하는 예술이 가능하다는 것을 전통 수묵을 통해 보여주었고, 이는 수묵을 오랜 전통으로 접해온 중국을 비롯한 나라에서 조차 그의 작품을 인정받게 하였다.
최근 세계 미술시장에서 수묵화와 서예가 강세를 이루는 가운데, 동양의 근 현대 작가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세계 경매 시장에서도 연일 최고가를 경신하고 있으며, 세계적인 유명 컬렉터들은 수묵화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콜렉션을 키워가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한결같은 박대성의 예술혼을 우리가 먼저 재조명하고, 주목해야 함은 마땅한 일이라 생각된다. 이번 전시를 통해 박대성의 작품세계는 물론, 다시 한번 한국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애정을 일깨울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