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도 시민이다”
차중근(유한양행 사장)
“명치유신 이후 5백 개의 기업과 자선단체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경영의 신’으로 추앙 받는 마쓰시다 고노스케에게 결정적 영향을 준 시부자와 에이치는 일본 자본주의의 원조(元祖)로 평가받는다. 그렇다면 한국 자본주의의 원조로 우리는 과연 누구를 뽑을 수 있을까? 나는 그 명예의 전당에 올라야 할 사람은 삼성의 이병철이나 현대의 정주영이기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온몸으로 보여준 유한양행의 유일한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5월 6일 롯데호텔 에메랄드룸에서 열린 인간개발연구원 조찬강연 강사로 나선 차중근 유한양행 사장에게 질문을 하며 이동희 오성연구소 이사장이 던졌던 말이다. 원로 기업가인 이동희 이사장은 이날 “유일한 사장이 1948년 정부 수립 직후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상공부장관 제의를 받았으나 거부했으며, 유일한 사장의 후손 중 한 명은 유한대학이 있는데도 지방대학 전임강사 공개시험을 치른 뒤 교수가 됐다”는 숨은 사연까지 소개했다.
실제로 두산, 경방과 더불어 국내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기업 중 하나인 유한양행(1926년 설립)은 그동안 수많은 경영시스템과 기업문화를 도입하거나 선보여왔다. 종업원지주제와 전문경영인체제의 도입(차중근 회장은 제7대 전문경영인이다), 사우공제회와 보건장학회의 설립, 재단법인의 설치와 전 재산의 사회환원 등이 바로 그것이다. 창립 이후 노사분규가 단 한 차례도 없었던 것도, 산업자원부가 올해부터 주관하는 ‘이 달의 기업인’ 첫 수상자로 고 유일한 사장이 선정된 것도, 기업인의 이름을 딴 도로 명칭의 국내 최초 사례인 ‘유일한로’가 경기도 부천시에 세워진 것도 그러한 내력들과 무관치 않은 셈이다.
따라서 우리는 유한양행과 그 창업자인 유일한 사장을 보면서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2001년 7월 채택했던 ‘그린 페이퍼’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보고서에는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진다는 것은 사회가 요구하는 법적인 기대수준을 넘어 인재와 환경, 기업의 이해관계자에게 더 많은 투자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라는 대목이 등장한다. 그렇다. 기업은 이제 단지 이윤추구 집단이 아니라 사회의 건강한 일원으로서 도덕성을 갖추고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하는 ‘기업시민'(Corporate Citizen)으로서의 역할까지 요구받고 있다. 이른바 ‘윤리경영’이 글로벌 비즈니스의 핵심적인 코드로 떠오르고 있거니와, 유한양행은 이미 한 세대 전부터 그것을 실천해온 것이다.
“창업자 유일한 선생은 생전에 ‘좋은 상품을 정성껏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 봉사하는 동시에 정직하고 성실하며 양심적인 인재를 키워내야 한다’고 말씀하면서 기업의 이익이 ‘일자리 창출’과 ‘정직한 납세’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하셨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것마저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강조하셨고, 세상을 뜨기 전에 마침내 그 약속을 지켰다. 좋은 제품을 생산하는 고객 중시, 인재를 양성하는 종업원 중시,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 중시가 유한양행의 경영이념이 된 것은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어서 차중근 사장은 유한양행이 장수하고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을 ‘전략적 네트워크’라는 용어를 동원해 설명했다. 협력업체(파트너십 유지·발전), 종업원(정보공유와 학습문화), 정부(성실납세와 준법경영), 경영자(참여경영과 책임경영), 고객(서비스 제고와 신뢰 쌓기) 등 각 구성원이 상생과 연대를 통해 가치를 창조할 때 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강렬하게 청중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킨 것은 차 사장이 강연 말미에 했던 다음과 같은 ‘평범하지만 소중한 제언’이 아니었을까.
“전문경영인은 ‘근사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근사한 사람은 바쁘면서도 여유를 누릴 줄 아는 사람, 책을 늘 가까이 하는 사람, 음식을 감사한 마음으로 먹음직스럽게 잘 먹는 사람, 누군가의 터무니없는 비방에도 씩 한번 웃어주고 마는 사람, 하루 일을 마치고 자신을 되돌아볼 줄 아는 사람, 다른 사람의 입장과 형편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 마음을 주고 마음을 받을 줄 아는 사람, 정직하고 깨끗하고 바른 마음을 가치 있게 여기는 사람, 남을 세워주고 인정하는데 인색하지 않은 사람,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을 가리지 않고 항상 인사성이 바른 사람이다.”
정지환 기자 ssal@ngotime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