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공은 “피바다” 될거라 했지만”
팜 띠엔 반 베트남 대사
“베트남의 면적과 인구는 남북한을 합친 것보다 넓고 많다. 현재 인구는 8천5백만명인데, 2020년이면 1억명을 무난하게 돌파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베트남이 동남아시아에서 인도네시아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의 나라임을 말해주는 객관적 수치이다. 특히 인구의 60%가 40세 이하의 연령이라는 점에서 베트남은 희망과 낙관의 기운이 흘러 넘치는 ‘젊은 국가’이기도 하다. 베트남은 저력(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미국을 군사적으로 이겨낸 나라), 잠재력(우수한 인력과 천연자원을 보유한 나라, 쌀 수출 1위와 커피 수출 2위), 매력(음식과 문화와 풍광 등 천혜의 관광자원을 가진 나라) 등 3력(三力)의 나라이다.”
한반도를 ‘제2의 고향’으로 삼고 있는 팜 띠엔 반 주한베트남 대사는 이렇게 ‘제1의 고향’ 베트남을 자랑하는 것으로 강연회 서막을 열었다. 실제로 그는 한반도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 왔다. 1967년 김일성대학 조선문학과에 입학한 그는 북한에서 15년, 남한에서 5년을 외교관으로 살았다. 부인은 공산당 아시아국 간부로 30년 동안 활동했으며, 장남은 경희대를 졸업한 뒤 북한에서 서기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40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베트남은 한국처럼 평화를 사랑한 나라였지만 동시에 외세의 침략을 제일 많이 받은 나라이기도 하다. 고대와 중세에는 중국과 몽골의 침략에, 근세와 현대에는 프랑스와 일본과 미국의 침략에 시달렸다. 호치민 주석이 1930년 공산당을 창설하고 애국세력을 동원해 독립운동을 전개한 덕분에 독립을 이뤄냈지만 프랑스와 미국의 재침략으로 또다시 국토는 전장으로 바뀌었다. 1955년 반불항쟁에 성공했지만 이번에는 미국이 남부 베트남에 친미정권을 세웠다. 다시 10년 동안 반미항쟁이 이어졌고, 1975년 7월 30일 사이공을 해방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경제적 시각에서 볼 때 그 기간은 ‘잃어버린 30년’이기도 했다. 베트남의 개혁과 개방을 상징하는 도이모이 정책이 초반에 부진을 면치 못했던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았음은 물론이다.
“30년 전쟁의 피해와 후유증은 가혹했다. 독립과 통일은 이뤄냈지만 경제와 산업은 후진국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77년 캄보디아, 1979년 중국과의 연이은 국경분쟁은 경제를 더욱 암담한 처지에 빠지게 했다. 10년 동안 이어진 미국의 철통같은 봉쇄정책도 치명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설상가상으로 베트남 지도부는 구소련의 계획경제를 국가발전전략으로 채택하는 정책적 오류를 범했다. 성장률은 1∼2% 수준에 머물렀고, 인플레이션은 지폐를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희망의 샘물은 극한적 절망 속에서 샘솟는 법이다. 개혁이냐, 죽음이냐? 자문하고 자답해야 했던 도이모이 정책은 바로 거기서 시작됐다.”
도이모이 정책은 1987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치열한 내부 논쟁과 협의를 거쳐 제6차 당대회에서 ‘죽음’ 대신 ‘개혁’을 선택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개도국으로는 최초로 APEC 2006년 정상회의 주최국이 되기까지 20년 동안 베트남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1987년부터 개방경제를 점진적으로 도입한 베트남은 1986년 774.7%에 달하던 물가상승률은 2003년 3%로 떨어뜨린 반면 1∼2%에 머물던 경제성장률은 7∼8%까지 끌어올리는 등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경제성장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대외관계도 개선시켜 나갔는데, 1995년 ASEAN에 가입한 것은 물론이고 적대국가였던 미국과도 국교정상화를 이뤄냈다. 그러나 여전히 베트남 경제체제의 기조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시장경제’를 유지하고 있다. GNP 5백달러가 되던 시기부터 빈곤퇴치와 교육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고도성장’보다 ‘안정성장’을 추구해온 것도 이러한 정책 기조와 무관치 않다.”
‘유창한’보다 ‘완벽한’이란 표현이 더 적합해 보이는 한국어 실력으로 청중을 놀라게 만든 팜 띠엔 반 주한베트남 대사. 그는 ‘제2의 고향’ 한반도에 다음과 같은 ‘애정의 충고’를 던지는 것으로 강연을 끝맺었다.
“통일을 이루기 위해 전쟁의 고통을 직접 체험한 베트남 사람으로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한반도는 반드시 평화적 방식으로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 다소 시일이 걸리더라도 화해와 협력을 통해 통합으로 나아가야 한다. 1975년 사이공이 해방됐지만 국회에서 베트남의 통일을 선언한 것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뒤였다. 그 1년 동안 우리는 토론과 협의와 합의의 시간을 가졌다. 많은 사람들이 전쟁 직후 복수와 징벌로 인해 사이공이 ‘피바다’가 될 것이라고 했지만 그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용서와 통합보다 더 강한 것은 이 세상에 없다.”
정지환 기자 [email protected]
팜 띠엔 반 대사의 이력서
▲ 1972년 베트남 외교부 입성
▲ 북한 베트남대사관 상무관
▲ 베트남 외교부 아주1과 사무관
▲ 북한 베트남대사관 제2서기관
▲ 베트남 외교부 아주1과 무역본부장
▲ 주한 베트남대사관 공사참사관
▲ 베트남 외무부 베트남대외위원회 문화부 본부장
▲ 주한 베트남대사관 특명전권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