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결국 핵무기 보유할 것”
김학준 동아일보 사장
‘부산 APEC을 통해 본 국제정치 질서와 한국외교의 성과와 과제’. 19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의 필독서 중 하나였던 <러시아혁명사>의 저자이자 6공화국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그라는 상반된 전력을 소유한 인물이었기 때문일까. 김학준 동아일보 사장의 강연 주제는 매우 길고도 복합적이었다.
“1989년 12개국이 참여해 각료회의 성격으로 출범했던 아시아태평양경제공동체(APEC)는 1993년부터 정상회담으로 그 지위가 격상됐다. 현재는 21개국이 참여하고 있는데, 전 세계 인구의 46%, 교역량의 47%, GDP의 57%를 포괄하고 있다. 한국도 교역량의 70.4%, 투자액의 63.3%를 이들 회원국에 의존하고 있다. 국제교역에서 차지하고 있는 WTO, DDA, FTA 등의 강력한 영향력에 눌려서 ‘종이 위의 국제기구’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부산 로드맵’이 발표된 이번 회담을 계기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 것도 사실이다. 특히 1995년 인도네시아 정상회담 당시 경제발전이라는 APEC 본연의 목표를 분명히 표명했던 ‘보고르 선언’을 재확인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번 회담의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상황이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APEC 정상회담이 거듭될수록 강대국 사이에서 패권경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것도 우려되는 여러 가지 현상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일극적 패권주의를 계속 유지하려는 미국과 이에 반기를 들고나선 나라들 사이에서 묘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한 것은 벌써 오래 전부터 감지된 일이다. 물론 미국에 맞서는 나라들의 선봉에는 중국이 있는데, 이들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필리핀, 태국 등 동남아 5개 국가와 한·중·일이 한 자리에 모이는 EAS(East Asia Summit) 창설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은 호주와 뉴질랜드의 EAS 가입과 인도의 APEC 가입으로 맞서면서 미일동맹을 강화하고 있다. 보다 거시적으로는 미국-영국-인도-일본 전선을 형성해 중국을 견제하고 압박하고 있다. 그 격랑의 틈바구니에서 균형자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우리의 운명이 얼마나 지난한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김 사장은 북핵 문제와 관련한 북한의 대응을 짚어보기 위해서는 이라크, 리비아. 파키스탄 등 다른 세 나라의 전례(前例)를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우선 이라크부터 보자. 이와 관련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만약 이라크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과연 미국이 침공할 수 있었을까? 결단코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본다. 반면에 리비아는 미국과의 외교적 타협을 통해 핵 보유 시도를 포기하는 대신에 체제를 보장받는 길을 선택했다. 실제로 가다피는 핵 보유 완전 포기를 선언했으며, 자진해서 국제기구의 철저한 검증까지 받았다. 미국은 그 대가로 경제제재를 풀어주었고, 카다피의 존립을 인정했다. 마지막으로 파키스탄을 보자. 국제사회의 온갖 반대와 방해에도 불구하고 파키스탄은 결국 핵 보유국이 되었고, 국제사회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인정한 바탕 위에서 협상을 진행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북한은 이 세 개의 전례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까. 김 사장은 “국제정세를 냉정하게 살펴보면 북한이 파키스탄과 같이 세 번째 길을 선택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언급했다. 그런 점에서 몇 가지 허점에도 불구하고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공동합의로 이끌어낸 제4차 6자회담의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부시 정권의 강경파 중에서는 평안도 영변과 함경도 태천 등 핵 시설이 있는 것으로 의심이 가는 몇 개의 지점에 직접 폭격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얼핏 들으면 시원하고 통쾌한 해결책처럼 보이지만, 한반도에 터를 잡고 삶을 영위해 나가야 하는 우리로서는 잠이 안 올 일이다. 실제로 휴전선에 미리 배치해놓은 1천 문의 북한 야포는 북폭이 시작되는 순간 남한의 수도권을 향해 불을 뿜을 것이다. 남한은 지금 북한의 인질이 돼 있는 셈이거니와, 군사적 방법은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과거 내가 책임 있는 자리에 있을 때 북폭 주장에 강하게 반대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음은 물론이다. 어쩌면 우리는 핵무기를 보유한 북한과 공존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동북아를 매우 불안정한 지역으로 몰아가는 악수(惡手)가 될 가능성이 높다. 북한이 핵을 보유하면 당장 대만이 나설 것이고, 일본 핵 무장의 빌미로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1세기를 맞은 동북아의 희망을 말하기에는 북핵의 어두운 그림자가 너무나 짙게 드리워져 있다고 말하는 김학준 사장. “미국과 북한의 중간에서 한국의 역할을 찾아나가되 ‘북핵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목표를 놓치지 말자”는 그의 마지막 호소에서 어떤 비장감마저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정지환 기자 [email protected]
김학준 사장의 이력서
▲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 서울대 정치학 석사
▲ 미 켄트주립대 정치학 석사
▲ 미 피츠버그대 정치학 박사
▲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학과장
▲ 미 버클리대 동아시아연구소 객원연구원
▲ 제12대 민정당 국회의원
▲ 대통령 정책조사보좌관, 대통령 공보수석비서관 겸 청와대 대변인
▲ 단국대 이사장
▲ 인천대 총장
▲ (사)한국국가기록연구원 초대 원장
▲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
▲ 한국정치학회 회장
▲ 세계정치학회(IPSA) 부회장
상훈: 한국정치학회 학술상, 황조근정훈장, 체육훈장 거상장
저서: 러시아사, 소련정치론, 한국전쟁, 한국정치론, 러시아혁명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