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썬키스트·요플레 개발한다”
정대근 농협중앙회 회장
“협동조합은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경제적 약자들이 경제적·사회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조직한 단체이다. 물론 처음에는 상대적 약자들이 협동을 통해 자본의 지배에 대응하고자 조직하기 시작했지만 분야에 따라서는 경쟁력을 갖춘 사업체나 세계적인 브랜드로 발전하기도 했다. 예컨대 프랑스 농협은행인 ‘끄레디 아그리꼴’은 자산규모에서 전세계 은행 중 3∼4위를 다투고 있다. 농업협동조합인 미국의 ‘썬키스트’와 프랑스의 ‘요플레’는 세계적인 브랜드로 발전한 경우에 속한다. 한국 유가공 업계에서 최고의 브랜드를 자랑하는 ‘서울우유’도 사실은 농협중앙회의 회원조합이다.”
1975년 31세의 나이에 경남 삼랑진단위농협 조합장으로 출발한 지 24년 만에 농협중앙회 수장의 자리에 오른 정대근 회장(아래사진)은 지난 12월 23일 롯데호텔 3층 사파이어볼룸에서 열린 인간개발연구원 조찬강연의 서막을 농협의 개념에 대한 설명으로 열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한국 농협은 시·군지부 1백56개, 지역조합 1천1백13개, 경제사업장 81개, 지점 7백42개, 금융점포 4천8백80개소에 2백38만명의 조합원을 거느린 매머드 조직이다.
“농협 마크는 ‘항아리에 쌀이 가득 담겨 있는 형상’을 갖고 있는데, 이는 결국 농협이 조합원들을 잘 살게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나는 반평생 가까이 단위농협 조합장을 하면서 농민 조합원을 만날 때마다 ‘사촌이 잘 사는 것보다 농협이 잘 되는 것이 여러분에게 낫다’고 말해 왔다. 실제로 농협과 조합원은 먼 곳에 있는 일가 친척보다 더 가까운 이웃사촌과 같은 사이라고 말할 수 있다. 농민들이 흙이 잔뜩 묻은 장화를 신고도 편하게 드나들 수 있는 곳, 목도장 하나만 있어도 1천만원 정도는 쉽게 대출 받아 자녀의 학자금과 결혼자금으로 쓸 수 있는 곳이 바로 농협이다.”
그러나 정 회장의 자부심 넘치는 설명에도 불구하고 농협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만만치 않게 제기되고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경제사업에 소홀하고 신용사업에 치중한다 △종합화에서 전문화로 나아가야 한다는 두 가지 목소리가 가장 높은 편이다. 물론 정 회장은 특유의 커다란 목소리와 경상도 사투리를 적절히 구사하며 해명에 나섰는데, 그의 두 가지 반론을 잇따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농협이 ‘돈벌이’에만 혈안이라고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게 무조건 비난할 일만은 아니라고 본다. 도리어 농협이 신용사업을 통해 지역금융과 농업금융 전문기관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실제로 일반 은행들은 점포의 85% 이상을 수도권과 광역시에 두고 있지만 농협만은 점포의 52.4%를 읍면 지역에 배치하고 있다. 일반 기업도 기회만 있으면 금융업에 진출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조직의 힘이 ‘든든한 주머니’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농협은 신용사업이라는 주머니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종자돈으로 삼아 각종 지도사업과 경제사업을 펼칠 수 있는 것이다.”
“서구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연구자들이 전문농협체제로 가야 한다는 주장을 많이 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서구에서는 영농규모가 크고 전업농 중심이기 때문에 전문화가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구와 우리의 농업 현실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선 우리나라 농가는 영농규모가 영세하다 보니 논농사, 밭농사, 축산, 과수 등을 복합적으로 할 수밖에 없다. 과수원도 규모가 최소한 1ha 이상은 돼야 과일 선별 등 전문화가 가능한 것이지 3백∼5백평 규모에서는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그러나 3천평 이상의 과수원을 가지고 있는 과수 농가는 전체의 5% 미만에 불과하다. 서구형 농협보다 일본형 농협에 주목해야 한다.”
이어서 정 회장은 1958년 농업협동조합(구농협)의 창립으로 시작된 농협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상호금융제도 도입으로 농촌지역 고리채 해소 △연쇄점사업으로 농촌물가 안정과 소비생활 합리화 △농촌 새마을운동의 주역으로 활동 △식량증산운동의 전개로 식량파동 극복 △1990년 전후 조합장 직선제로 지방자치선거의 시금석 마련 △미곡종합처리장(RPC)을 통한 쌀유통 혁신 △하나로클럽의 직거래 방식으로 농산물 가격파괴 선도 등을 중요한 업적으로 꼽았다.
“농촌 인구가 8%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제 더 이상 농업의 미래는 없다고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농협이 농촌지역의 경제·사회 발전을 견인하는 ‘지역종합센터’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 우리는 ‘재촌인구(在村人口)’라는 새로운 개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안동에 사는 사람들은 농민이 아니더라도 운명적으로 모두 농업·농민과 공존하며 살고 있다. 부실조합을 과감하게 정리하는 등 자구 노력을 통해 농업인과 국민들로부터 ‘고마운 농협’이자 ‘꼭 필요한 농협’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혼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정지환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