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나를 ‘조센징’이라 놀리지 않았다”
백진훈 일본 민주당 국회의원
‘어머니의 나라는 일본, 아버지의 나라는 한국’.
유창한 한국어 실력으로 자신을 ‘오팔년 개띠’라고 소개한 백진훈 일본 민주당 의원(참의원)의 명함에 선명하게 인쇄돼 있는 문구다. 실제로 그의 부친 고 백경석 씨(전 조선일보 일본지사장)는 경북 경산 출신의 한국인이다. 백 의원은 올해 7월 11일 실시된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벽보와 포스터를 통해 자신의 ‘출신 성분’을 당당하게 밝히고도 민주당 비례대표 의원으로 당선되는 영광을 누렸다.
“이른바 ‘경상도 사나이’ 출신인 아버지는 일제시대에 리츠메이칸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던 엘리트였다. 아버지를 만나 사랑에 빠진 어머니는 후지산 아래에 있는 야마나시현에서 태어났는데, 외조부가 이 결혼을 극구 반대했다. 결국 어머니는 ‘사랑’을 위해 집을 나와야 했고, 외조부는 세상을 떠나기 3시간 전에야 외손자에게 자신의 모습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여주었다. 한국인 아버지 이름으로는 취학 통지서가 나오지 않아 그냥 일본 이름으로 소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그냥 ‘하쿠(白)’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불렸던 소년 백진훈은 민족 차별을 견디지 못하고 몇 차례나 회사를 그만 두는 아버지의 쓸쓸한 모습을 지켜보며 자랐다. 그래서였을까. 니혼(日本)대학 건축공학과에 진학한 뒤에도 학업에만 열중했고, 4년 내내 장학생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도 아픈 비극은 찾아왔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나는 일류 건축회사가 운영하는 기술연구소에 성적표와 이력서를 제출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채용 과정은 형식적 절차에 불과했다. 지도교수의 강력한 추천과 소개가 있었고, 성적표도 올 A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일주일 후 ‘불채용’이라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최악의 결과를 통보 받았다. 심사위원들이 지도교수에게 밝힌 불채용의 이유는 ‘간코쿠데스네(한국인이군요)’라는 단 한마디였다고 한다.”
청년 백진훈이 ‘아버지의 나라’를 찾은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일본인 어머니 밑에서 자랐기에 배울 수 없었던 한국어를 뒤늦게 연세대 어학당에서 배웠다. 그리고 곧바로 일본으로 돌아가 아버지가 운영하던 조선일보 일본지사에 입사해, 광고와 판매 등 마케팅 업무에 종사했다. 그렇다면 언론계에서 일하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갈수록 악화되는 한일관계를 그냥 지켜만 볼 수 없었다. 한일관계의 악순환은 대략 일본 정치인의 역사왜곡 망언→조선일보 등 한국언론의 감성적 보도→한국인의 분노와 반일감정 증폭→한국인의 반일감정에 대한 일본언론의 감성적 보도→일본인의 분노와 반한감정 증폭이라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서로를 ‘이해(理解)’하기보다 ‘오해(誤解)’하며 살아온 것이다. 우연히 라디오와 TV 등에 나가 ‘한국 이야기’를 하면서 두 나라의 오해를 풀려고 노력하던 중 민주당의 요청을 받고 선거에 출마하게 됐다.”
물론 백 의원이 한국 국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면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일본 국적을 취득한 것은 2003년 1월의 일이다. “그것 때문에 정치인이 되고 싶어 국적을 버렸다는 오해를 많이 받았다”고 언급한 뒤 백 의원은 이렇게 해명했다.
“나는 40년 넘게 무수한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아버지 나라의 삶’을 당당하게 살았다. 그래서 이제 앞으로 40년 동안은 ‘어머니 나라의 삶’을 살고 싶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뒤 일본인 어머니 밑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랐지만, 어머니는 항상 나에게 ‘너는 한국 사람이다’라고 긍지를 심어주었다. 나는 아직도 마음 속으로는 한국 사람으로 살고 있다. 내게 그런 마음이 없었다면 선거에 출마하면서 벽보와 포스터에 ‘어머니의 나라 일본, 아버지의 나라 한국’이라고 써 붙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정치인 백진훈은 ‘한일관계 우호증진’과 ‘효도’를 선거공약 전면에 내걸었다. 그리고 그는 17일 동안 북해도에서 동경까지 내려오며 선거운동을 하면서 의미 있는 변화를 체험했다.
“선거운동 기간에 유세장에서 어느 일본인도 나에게 ‘조센징’이라고 놀리지 않았다. 그때까지 나는 일본인이 절대 변화를 바라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시대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아직도 나에게 ‘당신은 어느 편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나는 ‘한국과 일본이 가까워지는 것이 두 나라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답했다.”
참의원 백진훈이 선거에서 승리한 뒤 가장 기뻐한 사람은 어머니였다. 일본 국회에 깔린 빨간 주단 위를 걸어서 등원하던 첫날, 그는 어머니와 함께 동행했다. 어머니와 그의 손에는 두 장의 영정이 들려 있었다. 하나는 2년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사진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가 27세 때 자살했던 동생의 사진이었다.
정지환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