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 신문 안보기로 두 시간 벌었다”
허성관 행정자치부 장관
“해양수산부 장관 재직 시절 OECD 회원국 해양 관련 장관 회의에 참석했을 때의 일이다. 주최측이 한국에서 온 나를 매우 깍듯이 대접하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게 놀랄 일이 아니었다. 해양 분야에서 사실 한국의 국력은 세계 열 손가락 안에 든다. 그러나 국내만 들어오면 사정은 전혀 달라진다. 보수 신문만 보고 있노라면 한국은 벌써 망했어야 옳은 나라, 내일 모레면 곧 망해야 할 형편없는 나라처럼 느껴진다. 몇 주일 전에는 외신이 그런 국내 신문을 인용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한국 언론의 ‘자해 행위’가 너무나 안타깝고 답답하다.”
지난 11월 4일 오전 7시 롯데호텔 에메랄드룸에서 열린 인간개발연구원 조찬강연에서 ‘참여정부의 정부혁신에 대한 이해와 방향’을 주제로 강연한 허성관 행정자치부 장관(사진)은 일부 보수 언론에 대한 자신의 소회를 밝히는 것으로 말문을 열었다. 와이셔츠 차림에다 소매까지 걷어붙인 채 청중 앞에 선, 이 경영학과 교수 출신의 장관은 화이트 보드에 (1)왜 혁신인가? (2)무엇이 혁신인가? (3)어떻게 혁신할 것인가? (4)공직사회의 개혁은 왜 어려운가? (5)혁신이 되면 무엇이 어떻게 바뀌나? 등 물음표가 큼직하게 달린 다섯 개의 화두를 적었다. 지면관계상 강의 내용 중에서 인상적인 몇 대목만 직접화법으로 소개한다.
“가난한 시골 소년으로 태어난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아침에 일어나면 소에게 꼴을 먹인 뒤 20리나 떨어진 학교까지 뛰어갔다.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우여곡절 끝에 해외 유학도 가고, 대학 교수도 되고, 이렇게 장관도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 시골에 사는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이 나처럼 교수나 장관이 될 가능성은 거의 ‘제로’인 사회가 되었다. 이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다. 사전(事前)적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지지 않는 나라, 신분 이동과 상승의 기회가 풍부하지 않은 나라는 역동성이 없는 나라다. 우리가 혁신해야 하는 이유는 후손에게 보다 살기 좋은 나라를 물려주기 위해서인데, 살기 좋은 나라는 결코 ‘가만히 있어도 돈 버는 나라’가 아니라 ‘창의성이 존중되는 역동적인 나라’이다. 역동적인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혁신해야 한다.”
“혁신은 ‘제도나 방법, 조직이나 풍습 따위를 고치거나 버리고 새롭게 한다’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정약용 선생이 목민심서에서 언급한 온고지신(溫故知新, 옛 것을 연구하여 새로운 지식이나 도리를 찾아내는 일), 법고창신(法古創新, 전통적 방법과 새로운 방법의 절충), 실사구시(實事求是, 사실에 근거하여 진리나 진상을 탐구)에서 혁신의 전통과 정수를 읽을 수 있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는 혁신’이 때로는 ‘눈에 보이는 적과 싸우는 혁명’보다 더 힘들 때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지금도 위인으로 칭송 받는 조선의 대다수 학자들이 실제로는 방납(防納)의 폐해를 시정하고 상공업 발달을 촉진시키기 위해 도입하려던 대동법을 반대했다는 사실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
“발상의 전환은 혁신의 출발인데, ‘초판 신문 안 보기’도 그 중의 하나였다. 지금까지 중앙 부처 공직자들은 매일 저녁 5시경 나오는 초판 신문을 반드시 봤다. 그래서 과장급 이상 공직자들은 자기 부처에 불리한 기사가 실리면 해당 언론사나 기자에게 로비를 해서 다음날 독자에게 전달되는 배달판에 그 기사가 실리지 않도록 조치했다. 나는 장관이 된 뒤 그 관행부터 포기하라고 강력히 지시했다. 사실 잘못한 게 있으면 비판을 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잘못을 하고도 비판을 받지 않으려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 대신에 언론의 정당하고 건전한 비판은 수용해서 고치면 된다. 이렇게 발상을 전환하자 과장급 이상부터 대통령까지 무려 2시간의 업무 시간을 더 벌 수 있게 됐다.”
“모든 업무를 리뷰(Review)하면 문제 해결의 정답이 보인다. 반복적으로 제기되는 민원이나 감사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없애버린 ‘불필요하고 비효율적인 일’이 꽤 된다. 예컨대 산악과 바다가 만나는 굴곡 많은 지형의 부산에서 ‘자전거 도로’는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이 높다. 산에서 바다 쪽으로 내려올 때는 좋겠지만 거꾸로 이동할 때는 자전거를 끌고 가거나 지고 가야 한다(웃음). 아무리 좋은 사업이나 제도라도 현실과 맞아야 한다. 차라리 평지에 신도시를 지을 때 ‘자전거 도로’ 사업을 적극 반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행정 원칙을 ‘∼만 할 수 있고, 나머지는 할 수 없다’에서 ‘∼만 할 수 없고, 나머지는 다 할 수 있다’로 바꾸자 1천7백가지의 아이디어가 발굴됐고, 실제로 300가지를 개선할 수 있었다.”
“학습과 토론은 혁신을 지속하기 위한 원천이다. 조선시대에도 6조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일은 3정승이 모여서 논의했고, 3정승도 해결하지 못하는 일만이 임금에게 올라갔다. 그런데 임금도 해결하지 못하는 난제가 있을 경우에는 60여명의 군신이 한자리에 모여 경연(經筵)을 벌였다. 어떤 경우에는 하루 동안 조강(朝講), 중강(中講), 석강(夕講)이 잇따라 열리기도 했다. 그것을 당파 싸움이라고 매도한 것은 역사에 대한 무지가 아닐 수 없다. 우리 역사에서 혁신을 배워야 한다.”
정지환 기자 ssal@ngotime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