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를 위기로 인식 못하는 게 위기
김인호 중소기업연구원 원장
‘환란 주범’ 김인호. 1997년 IMF사태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었던 관계로 그의 이름 앞에 운명적으로 붙어 다니는 ‘낙인’이다. 공직자의 정책적 실수를 형사 심판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그 ‘낙인’이 쉽게 ‘누명’으로 바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아무튼 그는 지금 중소기업연구원 원장이라는 신분을 가진 공인으로서 사회적 발언을 진행하고 있다.
“문제는 네가 첫 번째 위기는 위기임을 알겠으나 두 번째 위기는 위기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위기를 위기로서 직감할 때에는 헤어날 방법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위기를 위기로서 인식하지 못할 때에는 자신도 모르게 멸문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심하여라.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풀릴 때가 혹시 무서운, 위험한 고비가 아닐까 생각하여라.”
김인호 원장은 작가 최인호의 베스트셀러 <상도(商道)>에 등장하는 대사 몇 구절을 소개하는 것으로 강연의 서막을 열었다. 이 대사는 주인공 임상옥에게 스승 석숭 스님이 한 발언인데, 임상옥의 미래에 닥칠 세 번의 위기에 대한 예언과 이를 벗어날 수 있는 비책을 알려주는 장면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그가 석숭 스님의 경고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제시한 지식 기반 사회의 특성 중 핵심 요소는 문제 인식 능력이었다. 이와 관련해 주목되는 것이 바로 know what(문제의 본질), know why(문제 발생의 원인과 배경), know how(문제 해결의 방법), know who(문제 발생과 해결의 주체) 등 4가지 키워드였다. 그런데 나는 한국 사회의 문제 인식 능력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지적 사회가 갖추어야 할 특성에서 오히려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한국 경제가 안고 있는 현안의 대부분이 문제의 본질에 대한 인식의 한계 내지 오류와 직결돼 있었다는 점에서 그런 혐의는 더욱 짙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 그는 한국 경제의 장&단기 전망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거나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움직임에 강한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 계속적으로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메시지(good message)를 전달하고싶어 하는 정부 당국의 경제 운용 방식도 꼬집었다.
“한국 경제에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공존하는데, 결국 장기 전망은 그 중에서 어느 면이 보다 부각될 것인가에 달려 있다. 물론 원론적으로만 본다면 한국 경제의 밝은 면을 잘 부각하고, 위기 요소를 기회 요소로 전환한다면 한국 경제의 장래는 밝을 것이다. 그러나 계량적 전망은 숫자 놀음에 불과하다는 것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일부 산업 및 소수 기업의 눈부신 경쟁력 향상에도 불구하고 구조적인 요소들이 근본적으로 개선되는 징후가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의 세계에는 공짜 점심과 같은 것은 없다’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경구가 던지는 메시지를 정확히 읽어야 한다.”
그렇다면 경제의 위기 구조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김 원장은 두 개의 화두를 제시했다. ‘위기의 본질에 대한 인식’의 중요성을 깨닫는 동시에 ‘성공 체험에 대한 매몰’을 경계하자는 것이 바로 그것. 여기서는 후자에 대한 발언만 소개한다.
“한국 경제는 1970년대 중반 이후 성공 신화에 도취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위기의 가능성은 이미 거기에서부터 잉태되고 있었던 셈인데, ‘고도성장’ ‘한국주식회사’ ‘경제제일주의’ 등 3대 신화가 바로 그것이다. 사실 1980년대 말부터 세계 경제가 구조적으로 변화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경제 운용 틀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끊임없이 밖으로부터 주어졌지만 이에 대한 우리의 충분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것이 결국 1997년 경제위기로 연결됐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성공 신화로부터의 탈출’과 ‘위기로부터의 올바른 교훈의 습득’이 국민 경제의 지속적 발전을 가능케 하는 가장 핵심적 요인이 될 것이다.”
김영삼 정부 이후 역대 민간 대통령이 이끄는 정부마저도 한국 경제가 가지고 있는 과거의 3대 성공 신화로부터 발전적인 탈피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김 원장의 냉정한 진단이다. 이어서 그는 인식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식’이 아닌 ‘세계식’이 필요하다. 글로벌 스탠더드를 충실히 수용하는 것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정부의 역할에 대한 규정도 바뀌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먼저 생각하는 정부가 필요하다. 부문간의 일관성이 유지되는 국정 운영 원리와 물 흐르는 듯한 경제 운영 원리도 절실하다. ‘시장으로 돌아가라’는 메시지를 놓치면 안 된다.”
정지환 기자 [email protected]
김인호 원장의 이력서
▲ 서울대 법학과 졸업
▲ 미 시라큐스대 맥스웰대학원 행정학 석사
▲ 국방대학원 안보과정 졸업
▲ 제4회 행정고등고시 합격
▲ 경제기획원 차관보, 대외경제조정실장
▲ 환경처 차관
▲ 한국소비자보호원 원장
▲ 철도청장
▲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
▲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
▲ (사)국가경영전략연구원 원장
▲ (주)와이즈인포넷 회장
▲ 시장경제연구원 운영위원장
상훈: 홍조근정훈장, 황조근정훈장
저서: 경쟁이 꽃피는 경제, 시장으로의 귀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