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코스모스가 활짝 피었다.
“나뭇잎 하나가 떨어짐을 보고 가을이 오는 것을 안다”고 하였다. 무덥고 긴 여름 끝에 성큼 다가선 가을, 아침저녁 문턱을 넘어오는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여름에 흐트러졌던 몸과 마음을 추스려야 하는 계절이다. 들판은 황금색으로 변하고 단풍으로 물든 가을은 누구에게나 풍요로운 결실의 계절이다.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은 농부에게는 웃음이, 문인에게는 글이, 연인에게는 진한 사랑이 된다. 불타는 가을은 정열의 계절이다. 나무는 불과 5~6개월 동안의 짧은 생애를 마치면서 자신을 아름답게 불태움으로 마지막 봉사를 하는 것 같다. 산에도 들에도 정열의 불이 타오르고 있다.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기 시작하면 “모란이 피기까지”의 시인 김영랑의 황토색 짙은 시 “오-매 단풍 들것네”가 떠오른다.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불은 감잎 날아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겄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리
바람이 잦이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밤이면 창틀 사이로 스며드는 귀뚜라미 소리가 영롱하다. 여름철 무더위 속에서 해이했던 생활 자세를 가드듬게 한다. 덥다는 핑계로 자신의 관리에 게으리지 않았는지, 삶의 자세를 너무 이완시킨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는 때이다.
눈부신 단풍에 달빛이 비치고, 벌레소리까지 자지러지면 가을은 형언할 수 없는 낭만 속으로 흠뻑 빠져든다. 팍팍한 살림살이에 단풍놀이를 할 마음이 쉽게 생기지 않는다. 그렇지만 가을이 선사하는 단풍을 찾아 후룰 털고 발길을 옮겨보자. 단풍 속에 빠져보면 어느새 몸과 마음까지도 함께 물들어져 영혼의 안식을 얻게 될 것이다.
젊어서 가졌던 미래에 대한 꿈보다는 오늘의 현실을 유지하기가 힘겨운 세상이다. 이 가을에 생활에 시달리면서도 랜터 윌슨 스미스의 시 한 수를 읽으면서 마음의 위로를 얻는다.
어느 날 페르시아 왕이 신하들에게 마음이 슬플 때는 기쁘게, 기쁠 때는 슬프게 하는 물건을 가져올 것을 명령했다. 신하들은 밤새 모여 앉아 토론한 끝에 마침내 반지 하나를 왕에게 바쳤다. 왕은 반지에 적힌 글귀를 읽고는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만족해했다. 반지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슬픔이 그대의 삶으로 밀려와 마음을 흔들고
소중한 것들을 쓸어가 버릴 때면
그대 가슴에 대고 말하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행운이 그대에게 미소 짓고 기쁨과 환희로 가득할 대
근심 없는 날들이 스쳐갈 대면
세속적인 것들에만 의존하지 않도록
이 진실을 조용히 가슴에 새려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단풍잎은 저리도 진한 선홍빛으로 물들어 우리의 가슴을 아리게 하지만 언젠가는 사라진다. 누군가는 말했다. “사라지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
꽃도 시들어 사라지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시들어 죽지 않는 꽃은 생명의 씨앗을 잉태하지 못하기 때문에 조화에 불과하다. 저렇게 화려하게 물들엇던 단풍이 퇴색해 낙엽이 질 대 그 자리에 어김없이 새봄을 준비하는 눈들이 감는다. 자라지는 것은 생명의 미학이요,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함께 연출하는 예술이다. 삶은 숭고한 것이고, 죽음은 아름다운 것이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맣은 열매를 맺느니라” 산야의 단풍이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날 성서의 한 구절이 뇌리에 자꾸만 되새겨 진다.
사라졌다가도 어김없이 다시 오는 아름다운 이 계절에 모두 함께 행복을 느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