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모교인 매산고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도 마음은 딴 데 가 있었다. 외국 유학의 길은 없을까,대학 강단에 서는 방법은 없을까 등의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서울대에서 경영대학원을 신설하고 학생을 선발한다는 내용이었다.
경영학을 공부하지는 못했지만 사시 준비를 하면서 법학 경제학 행정학 등을 열심히 공부한 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거기다 대학원 1회 출신이면 대학 강단에 서기도 쉬울 것이고 기업체에 취직을 하더라도 여러 기회가 있을 거란 추측이 머릿속에서 난무했다.
오래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나는 곧바로 학교에 사표를 내고 서울로 올라와 원서를 냈다. 그런데 경쟁률이 무려 6대1임을 안 순간 암담했다. 최선을 다하고 보자는 생각으로 아는 대로 답안지를 채웠지만 합격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본교 경영학과 출신들만 해도 엄청난 숫자인데 내가 합격할 가능성은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는 것만큼 어려우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내 이름이 합격자 명단에 들어있는 것이었다. 발표장에서 “아,인내의 하나님! 부족한 저를 버리지 않고 어떻게든 쓰시려고 하는군요.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는 말이 나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대학원에 들어가서부터 나는 학문다운 학문을 한다는 기분이었다. 학부에서 워낙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영어에 관한 한 자신감이 있었던 나는 도서관의 영문자료를 모조리 읽었다. 전문서적 간행물 등을 가리지 않고 탐독하면서 수업에 충실하다보니 학문이 급속도로 깊어져 가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당시 상대 학장이던 최문학 박사와 대학원장 민병구 박사,박희범 박사 등은 내게 관심을 갖고 공부에 많은 도움을 줬다. 그리고 동료들과의 진지한 토론 등은 정말 유익했고 그것들이 오늘의 내가 있게 한 바탕이 됐다고 믿는다. 교수님들은 학부 강의를 할 기회도 만들어줬다.
대학원을 마친 1968년은 내게 잊을 수 없는 해다. 가장 나이가 많았지만 졸업생 중에서 가장 먼저 교수로 추천을 받아 명지대 경영학과 전임강사가 됐다. 박사학위자나 외국유학 출신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대학원을 마치자마자 내가 임용됐다는 건 실력을 떠나 행운이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한 감동으로 가슴에 와 닿았다.
남들보다 항상 늦었던 내가 서른이 채 안된 나이에 교수가 됐다는 게 너무나 황홀했다. 살면서 큰일이 생기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을 찾게 된 나는 “시련도 주시지만 환희도 주시는 하나님,더 큰 영광을 하나님 전에 올리겠습니다”고 차분히 기도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항상 간직하고 있었지만 꾸준히 한 교회에 출석하지 못하고 있던 나는 스스로 광화문의 새문안교회를 찾아 새신자 등록을 했다. 주일성수를 엄격히 하고 신앙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이겠다는 다짐도 새롭게 했다.
대학에서는 경영학개론과 마케팅론,광고론 등을 맡겼고 나는 철저히 준비하고 강의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대학교수라는 직업은 외화내빈이었다. ‘초년병’이라서인지 몰라도 한달 봉급이 1만5000원 정도로 용돈도 채 되지 않았다.
앞에서 밝히지 못했지만 나는 대학원생이던 1967년 결혼한 상태였다. 살림이 쪼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돈 때문에 교수가 되고 싶어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하고 자위하며 스스로 의욕을 돋우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강의했다.
그런데 그 무렵 내 인생의 무대에서는 또 다른 막으로 바뀌기에 앞선 전주곡이 울렸다. 어느날 학과장이 나를 불러 “장 교수,우리가 미국 신문에 한국 관련 기사와 광고를 싣는 것을 대행하기로 계약을 맺었는데 그 일을 장 교수가 주도적으로 해보시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마케팅과 광고 등에 대해 이론적으로는 어느 정도 공부를 했다지만 현실에 어떻게 적용할지 막막했다. 자신있는 것은 영어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쩌랴. 내가 해야 할 일이라면 훌륭하게 처리해야 할 수밖에….
정리=정수익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