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무대가 또 다른 막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나는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런 중에도 항상 머릿속을 맴도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평탄한 길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진흙탕길도 주시고 가시밭길도 주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어려운 길에서도 강건한 믿음으로 최선을 다하면 순탄한 길을 열어주신다.
아마 나는 30대 중반쯤 인생에 대해서 제법 눈을 떴고 신앙인으로서도 제법 무르익었던 것 같다. 내 청춘의 열정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사업체인 KMI의 문을 닫고 나서도 상당히 의연했으며 사람 관리의 중요성에 대한 교훈까지 깨달았으니 말이다. 이때 얻은 교훈은 인간개발연구원 설립과 이후의 내 인생에 두고두고 영향을 미쳤다.
KMI를 정리하고 나니 내가 실업자 신세인 게 실감됐다. 막상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한다는 의욕만 간절할 뿐 구체적으로 방향이 잡히지 않았다. KMI 경영시 주위 사람들에게 괜찮은 인식을 줬는지 여기저기서 제안이 들어왔다. 대학 강단 복귀의 길도 있었지만 기업 경영에 대한 미련이 남았던 나는 동양섬유주식회사 경영을 택했다. 그러나 이 또한 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일본의 섬유기술을 전수받아 운영하기로 하고 설립된 이 회사는 일본 정치권의 반대로 사업을 시작해보지도 못하고 문을 닫았다.
그러고 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 서서히 내 인생에서 실현되기 시작했다. 인간개발연구원 설립의 기초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시작은 뜻하지 않은 한 일본인을 만나면서였다. 동양섬유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다소 홀가분하게 지내던 어느날 ‘지바’라는 일본인이 나를 찾아왔다. 폴 마이어의 SMI(Success Motivation Institute?성공동기연구소) 일본지사 대표였던 그는 1972년 내가 폴 마이어에게 주었던 내 명함과 많은 자료를 들고 왔다.
그때 내 머릿속에선 미국에서 마이어를 만나고 온 뒤 정신없이 지내면서 저편으로 밀려나 있던 기억들이 단숨에 되살아났다. ‘그래,바로 이거야’라는 생각이 이어졌다. 지바로부터 SMI 관련자료를 받아 검토한 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인간개발’ 분야를 국내로 들여와 연구하고 사업화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내면에 잠재된 밑천들을 있는 대로 끌어냈다. ‘경영자 계발을 위한 성취동기에 관한 연구’라는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준비 때 공부했던 것에서부터 폴 마이어 저서들을 탐독하면서 쌓았던 지식,그외 다양한 독서로 부단히 천착했던 인간 개발과 심리학에 대한 지식들을 총동원했다.
그리고 1974년 서울 충무로4가 허름한 적산가옥에 ‘한국인간개발연구원’이란 현판을 내걸었다. 당시 국내는 정치 경제 사회 등 어느 한 곳도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분야가 없는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솟구치는 의욕으로 일을 서둘렀다.
그러나 당시 연구원 운영에 앞서 내게는 피할 수 없는 짐이 지워져 있었다. 바로 한국CBMC(기독실업인회) 총무라는 직책이었다. 연구원 일은 다소 미뤄서 시작할 수도 있지만 CBMC 일은 방치할 경우 지금까지 조금이나마 쌓아놓은 기반조차 무너질 상황이었다.
연구원에 ‘한국기독실업인회’라는 또 하나의 현판을 내건 나는 CBMC의 전국 조직화를 위해 먼저 전국대회 개최를 추진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욥기 8장 7절 말씀을 곱씹으며 열심히 준비해 행사를 열었다. 당시 이한빈 숭실대 학장과 이기호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를 강사로 초빙,나름대로 성공을 거뒀고 이것이 밀알이 돼 올해로 30회 대회를 치렀으니 감개무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한집 두 살림’을 어느 정도 지속하다보니 둘 다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특히 인간개발연구원에 뜻을 두고 찾아온 인재들이 발길을 돌리는 걸 보고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한완상씨 등 훌륭한 인재들이 있어서 CBMC 총무직을 내놓았다. CBMC는 YMCA 건물로 이사했고 마침내 나는 인간개발연구원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됐다.
정리=정수익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