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병무 인간개발연구원 원장
1. 들어가는 말
명예퇴직 바람이 다시 불고 있다. 90년대 중반 유행처럼 불었던 명퇴열풍이 잠잠하다가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면서 새롭게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90년대의 명퇴 열풍과 요즈음 일고 있는 명퇴바람은 외양은 비슷하지만 그 특성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특히 최근 들어 ‘사오정, 오륙도’ 즉 “45세에 정년퇴직하는 게 당연하고, 56 세까지 직장 다니려고 생각하면 도둑이다”는 말이 유행하는 상황에서 일부 기업을 중심으로 불거져 나온 명퇴 바람은 직장인들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 더욱이 경기불황이 계속되면서 IMF급 감원바람이 불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팽배해지고 있어 근로자들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2. 90년대 명예퇴직의 특성
명예퇴직제도는 능력주의와 사회보장제도가 구축된 선진국에서는 보기 드문 제도이다. 반면에 우리나라와 일본은 연공서열제와 정년제가 보편화되어 있기 때문에 명예퇴직제도가 생겨났다. 명예퇴직제는 정년에 도달하기 전에 근로자가 자발적인 의사결정으로 일정액의 보상을 받고 미리서 퇴직하는 형태를 말한다. 명예퇴직제는 기업에 따라 희망퇴직제, 조기퇴직제, 선택정년제 등의 이름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명퇴의 역사는 1974년도에 정부에서 공무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것이 효시로 알려지고 있다. 정부의 명퇴제도는 공기업 부문으로 확산되어 85년도에 대한주택공사가 처음으로 실시한 이래 한국통신, 한전, 한국도로공사, 한국담배인삼공사 등이 도입하였다. 이어서 92년도에는 조흥은행을 선두로 한일은행, 상업은행, 국민은행, 주택은행 등 금융권이 명퇴를 실시하였다.
이처럼 조용하게 진행되던 명퇴가 사회적인 문제로 등장한 것은 96년도에 국내 굴지의 대기업인 S그룹의 힌 계열사 제조업에서 종업원의 25%를 명퇴라는 이름으로 감원시킨 게 계기가 되었다. 그 후 대기업을 중심으로 들불처럼 명퇴바람이 확산되어 98년 IMF 외환위기 때 중소기업을 포함하여 전방위적으로 실시되었다.
당시에 기업이 명퇴를 도입한 배경으로는 인력관리와 임금관리의 경직성을 들 수 있다. 세계화, 정보화시대가 태동되면서 한국기업은 저임금 고도성장의 이점이 사라지고 고임금 저성장시대로 진입함에 따라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필요조건이었다.
그러나 노조의 반대로 정리해고가 어려워 노동시장이 대단히 경직되어 있었다. 기업의 임금체계 역시 연공급이 주류였기 때문에 연령과 근속년수에 따라 인건비가 증가함으로써 임금관리의 동기유발기능이 상실되었으며 승진적체 현상으로 사기도 저하되어 있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인건비와 비효율적인 인력구조를 타파하기 위하여 기업은 노동시장 유연화 전략의 일환으로 명퇴제도를 활용하기에 이르렀다.
명퇴의 실시는 일시적으로 기업에게 비용부담을 주었지만 조직을 젊게 만들고 신규채용 기회를 확대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우수인재 유출, 남아 있는 근로자들의 애사심 위축 등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3. 2003년 명퇴바람의 특징
올 하반기에 들어서도 경기가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경기전망이 불투명한 가운데 기업들이 구조조정에 나섬에 따라 명퇴바람이 다시 불어 닥치고 있다. 통신업계의 과당경쟁으로 인해 맨먼저 군살빼기에 나선 KT에서는 5500명을 명퇴시키기로 결정함으로써 사회에 엄청난 파문을 던져주었다.
가계대출 부실로 고전하고 있는 은행권에서도 명퇴바람이 일고 있다. 외환, 우리, 국민은행 등에서 대규모 감원계획을 세우고 있으나 신청자가 기대만큼 많지 않아 고민에 빠져있는 상황이다. 두산중공업, 포스코, 대한항공은 이미 명퇴를 실시하였고, 삼성, SK 그룹 등에서도 연말까지 구조조정을 단행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경기에 대한 전망이 호전되지 않을 경우 또 한 차례 외환위기 당시에 준하는 감원태풍이 밀어닥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90년대의 명퇴와 최근의 명퇴는 유사점이 많지만 그 차이점도 드러나고 있다.
첫째, 대상의 연령이 낮아지고 있다. 과거의 명퇴는 40-50 대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최근에는 30대까지 내려감으로써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KT의 경우 대리급이 전체의 70%에 육박하고 은행권에서도 30대 대리급이 포함되기도 하였다.
둘째, 준비된 명퇴가 늘고 있다. IMF 외환위기 이전에 시행된 명퇴는 짧은 시간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지는 게 바람직하다는 풍조였다. 떠나는 자와 남는 자간의 갈등문제를 걱정했기 때문이다. 나갈 사람은 빨리 나가는 것이 좋다는 식으로 명퇴이후에 대한 훈련이나 준비가 없이 무조건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떠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므로 전직훈련(outplacement)을 통해 재취업이나 창업에 대한 준비를 하고 떠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최근 공개적으로 전직훈련을 신청하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으며 아웃플레이스먼트 관련 컨설턴트가 뜨는 직업으로 각광받고 있는 것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셋째, 대상자들이 명퇴신청에 신중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90년대의 명퇴자들은 그래도 소망이 있었다. 명퇴금과 퇴직금으로 구멍가게라도 차려서 샐러리맨의 서러움을 벗어나겠다는 열정과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퇴직보상금을 은행에 맡기면 높은 이자 덕택에 상당부분 생활이 가능하였기에 크게 두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요즈음은 구멍가게나 장사를 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다가 낮은 이자로 인해 그 돈으로 생활비를 감당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직장인들이 명퇴신청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모은행이 명퇴모집을 하였으나 예상인원의 10%인 20명 밖에 신청을 하지 않아 담당자를 애태우게 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만큼 직장인들은 명퇴를 해도 걱정 안해도 걱정일 정도로 고뇌의 늪에 빠져 있는 실정이다.
넷째, 상시구조조정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다. KT의 경우 예상 밖으로 많은 직장인들이 명퇴를 신청하는 바람에 담당자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파격적인 명퇴조건이 직장인들의 마음을 바쁘게 만든 까닭이다. 명퇴신청자들은 “이 번이 마지막 기회다. 앞으로 명퇴 위로금은 자취를 감추고 상시구조조정이 자리를 잡으면 선진국처럼 감원에 따른 보상금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는 예상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우리 근로자들 사이에서도 명퇴금을 지급하는 관행이 점점 사라지고 정리해고가 보편화되리라는 의식변화의 단면을 읽을 수 있다.
4. 노사정이 지혜를 모으자
이제 실업문제는 우리 사회의 최대의 화두가 되고 있다. 한국경제가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시절에는 실업률은 2% 대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우리 경제는 이미 저성장시대에 들어섰다. 잠재성장률이 7%대에서 4-5% 대로 떨어졌다. 1인당 국민소득은 95년에 1만달러를 기록한 이후 아직도 8년째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 우리는 고도성장 덕택에 실업문제를 강 건너 불처럼 여겼으나 지금부터는 가장 중요한 정책이 되고 있다. 2003년 8월 현재 실업률은 3.3%이지만 기업들이 대량감원을 실시하게 되면 더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실업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근로자와 노사정의 공동노력이 요구된다.
근로자는 노동시장의 흐름을 주시해야 한다. 한국 기업에서는 해고가 어렵기 때문에 경기변동이 실업률과 직접 연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 경기변화가 실업률에 즉시 반영되고 있어서 근로자들이 노동시장의 흐름에 민감하게 움직이게 된다. 앞으로 우리나라 근로자들도 노동시장과 경기변동이 함께 간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노동시장의 흐름을 주시하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동시에 몸값의 개념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몸값은 자신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노동시장이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몸값은 현재 받고 있는 급여가 아니라 현재의 직장을 그만두고 다른 곳에 가면 받을 수 있는 급여가 된다. 이를 기회임금(opportunity wage)이라고 한다. 기회임금이 높은 사람은 명퇴가 두렵지 않다.
노조는 노동운동의 목표를 고용보장에서 능력개발로 바꾸어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의 노동운동의 목표는 임금극대화와 고용보장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하지만 세계화 정보화시대에 투쟁으로 임금과 고용을 보장받는다는 것은 일시적으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노조는 진정으로 근로자를 위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전직훈련제도에도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경쟁력 있는 근로자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야말로 근로자들에게 생선 한 마리를 주는 미봉책이 아니라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어 스스로 평생의 식사를 해결할 수 있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 평생직업시대에 근로자들이 어디에 가든 일자리를 구할 수 있도록 고용가능성(employability)을 높여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 노동운동의 목표를 근로자의 교육훈련과 능력개발이 두어야 하는 것이다.
기업 역시 인적자원개발 투자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초일류기업의 특성은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기업문화이다. 인재를 확보하고 육성하는 능력이 경쟁력의 첩경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적자원개발에 투입되는 요소를 비용으로 생각하지 않고 투자로 인식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는 게 바람직하다. 근로자들의 능력개발에 아낌없는 투자를 하면서 경기가 어려울 때는 명퇴나 해고는 마지막 수단으로 간주하고 고뇌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유한킴벌리는 IMF때 감원을 해야하는 상황에서 4조 2 교대제를 도입하여 근로자들의 능력개발에 심혈을 기울인 결과 근로자들의 능력과 의욕이 획기적으로 향상되어 매출액이 늘어 오히려 고용이 확대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정부의 역량은 일자리 창출에 모아져야 한다. 앞으로 정부는 실업과의 전쟁을 국정의 최우선과제로 삼고 대처해 나아가야 한다. 고용창출은 어떻게 가능한가.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 때 현실화될 수 있다. 기업하기 힘들면 좋은 곳을 찾아나서는 게 세계화시대 기업의 생존전략이다. 우리의 많은 기업들이 중국으로 공장을 옮기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직시하면서 고용창출에 지혜를 모아야 한다.
다시 부는 명퇴바람. 직장인에게 다가 오는 위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위기는 위험과 동시에 기회를 내포하고 있다. 근로자와 노사정이 위기의식을 느끼고 대처하여 밀려오는 고용불안의 파고를 뛰어넘을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