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에이지] <14> 쁘띠프랑스 일군 전 신광페인트 CEO 한홍섭
경기 가평의 호숫가에 2008년 7월 문을 연 프랑스 문화마을 ‘쁘띠프랑스’. 이국적인 건물이 들어선 마을 곳곳엔 <어린왕자>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조형물과 그림들이 배치돼 마치 어린왕자의 소행성에 온듯한 착각을 하게 만드는 곳이다. 그는 매일 그 일터를 찾아 자신의 꿈을 현실에 펼쳐내고 있다.
한 회장에게 고향을 물었더니 용인ㆍ안성이라고 했다. 용인이면 용인이고 안성이면 안성이지 용인ㆍ안성은 뭐냐 되물었더니 “나고 자랄 땐 용인 고삼면이었는데 나중에 안성 고삼면이 되더라”고 답했다.
형은 그럭저럭 대학까지 공부를 했지만 그에게까지 기회가 오진 않았다. 니스 제조 일을 하던 외삼촌이 “어머니 고생시키지 말고 기술 배워 장사나 하라”고 해 따라가 일을 배웠다. 일찍 장사를 시작해 45년 전 서울 왕십리에 종업원 한 명 두고 자신의 이름을 단 가게를 차렸다. 이후 사업을 키워 목재용 페인트 전문기업인 신광페인트를 일궈냈다. 그는 자수성가한 사업가의 전형을 걸어왔다.
그는 그 때 번듯한 미술관 하나 차리고 싶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자신이 감동받은 프랑스 문화 예술의 향취를 한국인과 적극적으로 나누고 싶은 생각이었다.
미술관을 세우고자 했던 그의 생각이 점차 구체화하면서 많은 벽에 부닥치기 시작했다. 그는”에버랜드엔 사람이 몰려도 그 옆 국보까지 모셔놓고 있는 미술관은 늘 한가하더라”고 했다. 미술관 운영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에 방향을 바꾸었다. 한 회장은 그를 매료시킨 프랑스의 문화를 알리는 방식으로 문학과 풍경을 선택했고 지금의 쁘띠프랑스를 만들었다. 그는 “프랑스에 반한 건 처음엔 미술관 때문이었지만 그 다음엔 음식과 풍경이었다. 프랑스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을 불러들이는 나라다. 그만한 매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그가 20년 전 프랑스마을을 계획한 이후 유럽을 오간 게 벌써 50~60번. 시간만 되면 프랑스를 찾았다. 그 새 마일리지 카드는 플래티늄회원으로 승격됐다. 그는 1997년 피와 땀을 흘려 일궜던 신광페인트를 정리했다. 제조업의 한계를 느껴왔던 터인데다 이젠 그에겐 새로운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왕자를 주요 테마로 삼은 것은 전략적이다. 그는 “한국만큼 <어린왕자>를 좋아하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지금껏 한국에선 180종의 <어린왕자> 책이 출판됐다. 지금도 교보문고에 가면 각기 다른 <어린왕자> 40권을 만날 수 있다. 파리의 가장 큰 책방에 가도 <어린왕자>는 3종류 밖에 없다”고 했다.
쁘띠프랑스 구상 때문에 파리를 찾았을 때 일이다. 현지의 아는 KBS 직원과 이야기 하던 도중 그날 서울 본사에서 국장급 한 분이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쁘띠프랑스의 홍보를 위해서도 미리 알아두는 게 좋을 것 같아 소개시켜달라고 했다가 지인으로부터 “방송사 국장이 대수가 아니다. 민원엔 한계가 있다. 프랑스 것 최초를 보여주라. 최초만 되면 자연히 언론도 따라 붙을 것이다”조언을 받았다. 그 이후 최초, 독특함에 대해 계속 고민하게 됐고 그 고민이 지금의 쁘띠프랑스가 안정적으로 자리잡을 수 있는 힘이 됐다.
보람 있는 일을 하려고 했는데 주위에서 많이 말렸다. 모든 일을 접고 하는 일이라 이익이 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란 걱정도 들었다. 그는 “지금 생각해보니 몰라서 용감했던 것 같았다”고 했다. 회사는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리하는 것도 중요한데 이쪽에 신경 쓰느라 신광페인트를 너무 헐값에 넘겨버렸다. 게다가 쁘띠프랑스에는 생각지 않게 자꾸 돈이 들어갔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돈이 빠져나가자 아내가 많이 불안해 했다. 아무리 좋은 뜻이고 원해서 하는 일이지만 집사람까지 불안하게 해선 안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고민도 깊어갔다. 다행히 쁘띠프랑스는 개원한지 몇 개월 안에 자리를 잡았고 안착을 하게 됐다. 그는 “사실 주위에 아무도 잘 될 거라고 믿어준 이들이 없었다. 그냥 하던 거나 하고 밥 먹고 살지, 하는 이야기가 많았다. 많이 외로웠고 외로운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지나고 보니 내가 참 고집이 셌구나. 또 무모했었구나 생각이 든다. 큰 탈없이 잘 됐으니 천만다행이다”고 했다.
지금의 쁘띠프랑스를 낳은 것은 ‘베토벤 바이러스‘란 드라마의 힘이 컸다. 어느 날 모르는 사람들이 찾아와 촬영 좀 하겠다고 해서 그럼 장소 대여비를 달라고 했다. 다른 데선 오히려 돈도 대준다던데 좀 양해해 달라는 부탁에 그럼 서로 주고 받기 없기로 하자며 장소를 빌려줬다. 한 회장으로선 돈 한 푼 안들이고 쁘띠프랑스를 전국에 알리게 된 기회였다.
한 회장은 비 내리는 날 쁘띠프랑스에 찾아오길 권했다. 찾는 이 드물어 한적해진 공간에서 호수가 피워 올리는 물안개를 바라보면 마음이 한없이 편안해진다고 했다. 그 풍경 속에서 그는 조용히 어린왕자의 꿈을 피워 올린다고 했다.
둘째. 무엇보다 개성이 있어야 한다. 다른 데서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줘야 사람들이 모여든다. 규모나 화려함 보다 개성이 더욱 중요하다. 내부 전시물로 사용될 오르골, 닭 모형들을 고를 때도 그 독특한 가치가 인정되면 가격에 상관없이 사들였다. 어린왕자를 테마로 결정한 이후 일면식도 없는 파리의 생텍쥐페리 기념 재단에 여러 번 찾아가 자료를 부탁했고 결국 성사시켰다. 셋째. 오래 차근차근 준비해야 한다. 쁘띠프랑스를 계획한 이후 오픈하는 데까지 20년이 걸렸다. 프랑스에서 가져다 복원한 전통가옥의 경우 15번을 찾아가 발견한 집이다. 하루 현지 가이드 비용만 400유로가 드는 출장길이다. 오를리앙 숲 속에서 그 집을 발견할 때까지 오랜 기간 이곳 저곳을 찾아 헤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