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신 정신과 전문의가 쓴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제1302회 강연)에 대한 칼럼 기사(한겨레신문 2003-09-29)
정신치료에서는 환자가 말하는 내용 자체보다 그 내용을 펼쳐가는 과정에 문제의 핵심이 담겨 있다고 판단한다. 보호자로부터 환자에 대한 정보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다. 보호자가 환자에 대해 지나친 죄의식이나 적개심을 품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는 내용에만 집착하면 엉뚱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전체적 ‘맥락’에서 파악해야 환자의 실체적 진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참여정부와 언론의 관계는 ‘맥락’이라는 개념이 발붙이고 있을 틈조차 없어 보인다. 언론정책의 실무 책임자인 문화관광부 이창동 장관과 보수 언론의 관계는 특히 그렇다.
최근 보수 신문들의 문화면에는 이 장관의 현실감각을 문제삼는 기자나 논설위원의 글들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 근본원인이야 문화부 홍보 방안에 대한 불만 때문이겠지만, 그들이 내세우는 표면적 이유는 이 장관이 ‘개혁코드’를 빌미로 문화계를 편가르기 한다는 것이다. 이 장관이 지금처럼 코드맞추기에만 골몰하면 그의 ‘필모그래피(작품목록)에 장관직이 부끄러운 작품으로 기록’되거나 ‘장관으로도 예술인으로도 실패’한다는 문화적(?) 협박이 난무한다. 나는 이 장관이 문화계를 편가르기 하고 있다는 그들의 대전제에 동의하지 않거니와 이 장관의 현실감각에 문제를 제기하는 그들의 현실감각이 문제가 있다고 느낀다.
나는 ‘소통의 문제’에 대해서 이창동처럼 일관적이고 절실하게 고민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이창동은 장관이 되기 이전부터 ‘소통’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사람이다. 그의 소설이나 영화는 ‘결국은 나와 남, 우리와 우리가 배척하는 것들 사이의 진정한 소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충돌이 일어나는 경계선에 서 있는 것은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진정한 소통을 원한다면 그 자리를 피해선 안된다’는 게 그의 일관된 소통철학이다. 하지만 거대 신문들은 영화감독이 아닌 ‘장관 이창동’의 이런 소통방식을 탐탁지 않아 하는 눈치다.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표현한다.
그가 영화감독이던 2000년 2월, 한 신문은 ‘이창동 감독이 만든 영화들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매스컴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고 표현했지만, 장관 취임 후 이창동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언론으로부터 융단폭격을 당하고 있다. 그런 기사들 중에는 이 장관이 노 대통령의 친위대로 언론탄압(?)의 선봉에 서 있는 것처럼 묘사하는 경우도 많은데 나는 그런 기사를 볼 때마다 그들의 단세포적인 발상에 기가 질린다. 오랫동안 이창동의 예술세계를 통해 혹은 직접 그를 대면하면서 그의 가치관이나 개인적 성향을 충분히 알고 있을 언론인들이 그런 말을 하니 답답하고 한심하다. 자기들 생각과 다르면 그것대로 비판하면 그뿐이다. 하지만 그들의 사전에는 ‘맥락’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장관이 ‘언론과의 관계 개혁’을 추진하는 건 노 대통령과 코드를 맞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평생 화두와도 같은 ‘소통의 문제’가 언론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이창동은 ‘(장관이 되기 전부터)한국 사회 소통 부재의 상당한 책임이 언론에 있다고 생각해 왔다’며 ‘이제 언론도 소통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언론이 균형감각을 갖고 각 사회 단위를 소통시켜 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의 완벽주의적인 성향에 비추어 언론문제에서도 촬영 현장에서처럼 소통이 원활해질 때까지 ‘찍고 찍고 또 찍는’ 그의 ‘변태’ 기질이 발휘될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그런 만큼 한나라당의 표현처럼 ‘언론이 이창동과 전쟁에 돌입한 상태’는 계속될 것이다.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이창동의 국회답변 때 ‘영화 같은 얘기 하지 말라’고 호통을 쳤지만 이창동이 어떻게 영화를 찍는 줄 알았다면 ‘당신 영화처럼 얘기하라’고 말했을 것이다. 언론들도 이창동표 영화처럼 정상적 소통과 전체적 맥락의 관점에서 이창동을 비판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