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없는 이야기이지만 여러분의 앞으로의 생활에 큰 도움이 되고 마음의 평화가 될 수 있길 바라며 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제가 이만큼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제 개인의 능력이나 힘보다는 저에게 항상 손을 내밀어 주시고 격려해 주시는 창조주의 도움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삶에 있어서 인간의 한계를 갖기에 의구심과 불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앞으로의 여러분의 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해서 제 변변치 않은 얘기를 드립니다.
전 어려서 만주 대륜에서 자랐습니다. 5~6살에 아버님의 사업으로 인해 가족 모두 그 곳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요동반도의 남쪽에 있는 아름다운 도시로 ‘동양의 진주’라고 일컬어지는 곳입니다. 어린 저의 눈에 비친 대전은 너무나 아름다운 도시였기에 ‘나도 이런 도시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막연하게나마 건축가의 꿈을 갖게 하였습니다.
대륜에는 한국학교가 없었기에 일본학교에 입학하여 초등학교 3학년까지 다녔습니다. 그 곳에서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수없는 멸시와 모욕, 집단따돌림 등 민족차별을 받았습니다. 그런 저에게 인생의 전환기를 만들어 일본인 ‘하라’여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그 분은 제게 칭찬을 해주심으로써 자신감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어느 날 선생님이 저를 일으켜 세우시더니 학급생들에게 ‘김군이 수학에서 100점을 맞았다’며 칭찬을 해 주셨습니다. 아마도 그런 행동엔 서툰 일본말과 학급내 유일한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던 저를 칭찬하심으로써 아이들에게 ‘저런 사람을 괄시치 말라’는 숨은 뜻이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저는 자신감이 생겼고 학교생활도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의 경험이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가를 몸소 체험하였기에 부모가 자식들에게 칭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귀한 것인가 말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중국에서 배웠던 것은 중국사람들의 깊은 생각과 대륙성기질로 인한 서두르지 않는 여유였습니다. 아홉 대문을 거쳐야 비로서 그 집안에 들어설 수 있을만큼 속이 깊은 민족입니다. 해방을 맞이해서 장개석이 대륜에 온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모두 폭죽을 사고 환호하며 그를 기다렸는데 결국 오지 못한다는 소식이 왔는데도 그들은 우리의 붉은 악마가 그러하듯이 계속 환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야 정말 중국사람들 대단하구나’라고 느꼈습니다.
만주 넓은 들판의 지평선을 보신 적 있습니까? 그런 광활한 땅에서 사는 사람들의 도량이라는 것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중국인들의 ‘만만디’정신을 아실겁니다. 천천히 그러나 끝까지 하고야 마는 그들의 정신은 분명 장점이자 우리가 배워야 할 것입니다. 또한 그들의 상호협력정신 또한 대단합니다. 예를 들어 상속문제에서 형제는 5형제인데 소는 3마리뿐이라면 이들은 이를 키워 5마리가 될 때까지 기다릴 정도입니다. 이런 점도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 한가지 일본이 패망을 하고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철수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집안의 값비싼 가구들을 싼값에 팔려고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이를 중국인들은 사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일본인이 이렇게 비싼 물건을 싼 값에 살 수 있는데 왜 안사냐고 물었더니 중국사람이 말하길 어차피 너희가 놓고 가게 될 물건인데 무엇하러 돈을 지불하고 사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일본인이 말하길 네가 안사면 다른 사람이 살텐데 그래도 좋으냐고 하니깐 그건 상관없다. 어차피 우리 동족이 사는거니까 그건 괜찮다라고 했답니다. 이를 보면서 그들의 민족성과 대륙성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어려서 만주에서 보고 느낀 일들입니다.
인생에는 누구나 전환점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의 여러분도 그 전에 여러 우여곡절을 통해 많은 변화를 거치며 오늘날의 여러분이 되셨을 겁니다.
기죽어있고 자신감 없던 저에게 기를 불어넣어 주었고 자신감을 일깨워 주었던 것이 나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6.25 사변이 일어나고 저는 개나리 봇짐 하나를 메고 이북에서 월남하였습니다. 6월 28일 한강을 도강하여 앞서 도망가는 국군과 뒤로는 인민국이 쫒아오는 긴박한 상황에서 간신히 한달 이상 걸려 부산까지 간신히 피난을 내려 왔습니다. 대구와 진주까지 인민국이 내려왔을 때에 군에 입대하려 했으나 나이가 어려서 받아주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찾아간 학도의용군에서 찾아갔더니 받아주어서 정군하였습니다. 그 때 제 나이 19살이었습니다.
부산에서 입대하여 일본으로 가서 한달도 채 안되는 기초훈련을 받고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인천상륙작전 당시 장군이 탔던 배에 승선하여 인천에 상륙하였습니다. 인척에 상륙한 그 날 밤 엄청난 포성과 불빛에 겁이 어린 저에겐 지옥같았습니다. 거기서 안양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 부산서 육지훈련을 받은 후에 배에서 대기하고 있던 우리는 일주일 후 야음을 타고 함경도 이원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이원은 삼수갑산이라 하여 산세가 험하고 추위가 심하기로 유명하여 소변을 누면 그대로 고드름이 될 정도입니다. 숨을 쉬기에도 힘들 정도인 곳입니다. 거기서 부대의 일부가 해산진까지 올라가 압록강 물을 떠 이승만대통령에게 진상했다고 합니다. 중공군의 침공으로 50년 11월 29일 함경도의 호수 장길호에서 온몸에 부상을 입고 후퇴하였습니다. 인민군의 빗발치는 총알 속에서 앞선 전우가 총을 맞고 쓰러진 모습을 보고 지혈을 해주던 중에 저도 총에 맞았습니다. 총에 맞는 순간 하늘이 깜깜해지며 정신이 아득해지더니 한동안 실신을 했습니다. 한참 후에 의식을 차려보니 주위엔 눈이 내려 있었고 제가 흘린 피로 주변엔 피바다가 되었습니다. 지혈을 해주었던 전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때 다급해진 저는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 저를 좀 구해주세요’라고 간절히 하나님께 호소하고 싶은데 소리가 나질 않았습니다. 순간 내가 얼마나 죄를 지었기에 하나님이 내 최후의 순간에 나의 부르짖음을 안들어주실까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총격 당시 고막에 손상을 입어 소리를 질렀으나 안들렸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상반신만 부상을 입었기에 살겠다는 의지로 총을 둘러메고 철모를 찾아 쓴 후 언덕밑으로 억지로 기어내려와 후퇴하던 아군의 트럭에 올라타고 가던 중 중공군의 포화를 받고 다시 다리에 총상을 입어 부상을 입었습니다. 언덕 밑으로 굴러 떨어진 후 뒤에서 빚발치는 총알을 피하며 굴러서 도망을 쳤습니다. 한참을 도망을 하고 나서야 총성소리가 멀어지는 걸 느끼자 그때서야 온몸은 고통으로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그 순간 ‘아 이렇게 얼어죽는구나’하는 생각하면서도 한편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생겼습니다. 저는 육남매인데 살아오면서 그들한테 잘못했던 일들이 떠오르며 후회가 들었고 그래서 꼭 다시 재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운좋게도 간신히 장진호로 돌아간 저는 미군의 도움으로 비행장으로 옮겨졌습니다. 그 곳엔 수많은 부상병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제 부상정도가 심했던지 비행기로 후송되었습니다. 그 뒤 고터리전투라 하여 해병사단이 비행기로 다리를 폭파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 일로 후퇴길이 막혔고 미군이 그때 삼천명이 죽었답니다.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저는 바로 죽음을 눈앞에서 보았고 주변에 여러 사람이 죽는걸 보면서 인생관이 달라지고 죽음을 초월하는 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인생이 이생에서 끝나는게 아니며 내세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내세는 하나님의 심판이후에 하나님의 나라에도 갈 수 있고 지옥에도 갈 수 있다는 세계관을 갖게 되니깐 믿음이란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느낍니다. 사람이 신념을 갖고 사는 것과 신념없이 사는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의지할 수 있는 분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인생을 변화시키겠는가 생각합니다. 내 생활은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모든 일이 기쁘고 영광스럽습니다.
저는 늘 저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느낍니다. 해방 이후 만주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후 공산치하에서 앞날이 안보이고 상황에서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가족과 피난을 떠나는 과정에서 기적같은 일을 여러번 경험했습니다. 온 가족이 네 번에 걸쳐 피난하면서도 단 한 사람의 사고없이 모두 서울서 만나 지금껏 살고 있습니다. 혹자는 쉽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렇게 흔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군에 정군하여 부상을입고 사경을 헤매면서 저는 하나님이 계시고 제게 도움을 주신다고 느꼈습니다. 지금까지 매일 아침 새벽기도를 드리는데 그것이 나의 하나의 생활이 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방법이자 기쁨을 갖다주는 원천이기도 합니다. 아침에 싱그런 공기를 마시며 묵상하면서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실까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한번 돌이켜보면서 묵상하며 산다는 것은 상당히 가치있는 삶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70살이 넘는 나이에도 젊은이 못지 않게 테니스를 칠만큼 건강한 이유도 나태하지 않고 술먹지 않으며 새벽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라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52년에 공과대 건축과에 입학하여 지금까지 반세기동안 건축가의 삶을 살아온 저는 선배가 없어 스스로 뚫고 나가야 했었습니다. 그런 시대적인 상황으로 지금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중견건축가가 될 수 있었지만 반면 그렇기에 체계적으로 제대로 배우지 못한 점도 있습니다.
건축공부를 시작한 이후 50년 세월동안 오로지 건축설계분야에만 몸담아 왔습니다. 이 또한 특별하신 분의 은혜라고 생각하며 겸허이 나에게 맡겨진 사명이 무엇인가 생각하며 앞으로도 살아가려 합니다.
제 믿음의 삶에는 어머니의 기도가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어린 시절 아침에 일어나 거실에 나와 보면 어머니는 항상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시며 기도를 하셨습니다. 어머니의 기도는 항상 두가지 소원이었습니다. 하나는 우리나라의 통일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우리 5형제 중 하나를 하나님의 종인 목사가 되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응답은 제가 아닌 저의 아들에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삶으로 인해 지금의 제가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께 또 하나 감사드려야 할 일은 6월 17일로 정림건축이 35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 인생의 절반의 역사를 지닌 정림건축은 그동안 궁궐을 비롯해 청와대 본관, 프레스타운, 춘추관 등 많은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국립중앙박물관은 국제현상을 내걸었는데 전세계에서 내놓라 하는 건축가의 작품 342점 가운데 우리가 당선되었습니다. 건축안을 설계할 당시에 우리나라의 역사를 담는 그릇과도 같은 문화시설을 외국인에게 맡긴다면 얼마나 창피한 일이며 외국인이 과연 우리의 문화와 전통을 얼마나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 걱정했으나 다행히도 우리안으로 결정되어 큰 쾌재를 불렀으며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인천국제공항의 경우에도 국제현상이었는데 여러 유수한 외국의 전문기업 12그룹이 경합하였으나 우리안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상암월드컵경기장의 경우엔 거의 현대건설로 결정되었으나 그래도 우리는 중요한 프로젝트이므로 한번 해보자하는 심정으로 내놓았는데 오히려 현대건설보다 더 높은 점수를 받아 당선되었습니다. 저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월드컵에 일본과 한국이 각각 10개의 경기장을 지었는데 일본이 규모나 전체지붕을 덮는 경기장, 다목적 경기장 등을 지었다면 우리나라는 디자인면에서 훨씬 우수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세계 어디에 갖다놓아도 굉장히 자랑할 만한 수준입니다. 그 밖에도 각종 은행의 본점 및 수백개의 교회를 설계했습니다.
현대건축이 규모나 기능이 나날이 복잡해지기 때문에 한 사람의 프랜?(or프레임?)갖고는 모든 걸 완벽하게 소화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조직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저는 ‘설계집단’이라는 말을 즐겨쓰는데 여러 분야에 맡은바 코디레이션이 잘이루어져야 현대시설건축물을 완벽히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직은 우수한 인재가 모였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효과를 발휘할 수 없습니다. 오랫동안 같이 호흡을 맞춰야 좋은 설계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현재 정림건축을 거치고 간 700여명의 인재가 각계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는 정림건축이 인재양성에 이바지했다고 자부합니다.
건축은 하나의 기술이 아닙니다. 건축은 하나의 예술입니다. 그러나 예술만으론 안됩니다. 기술이 예술에 잘 가미될 때에만 쓰기좋고 편안한 건축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아름답게 지었다 할지라도 쓰는 사람이 불편하고 안전을 고려치 않았다면 제대로 된 건축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건강한 건축’입니다.
저는 건축주의 요구에 어느 정도 맞춰야 하지만 너무 개인적인 취향보다는 그 건물을 사용할 다수의 사람들 위주로 건축하고자 합니다.
정림건축의 비전과 목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현대사회의 요구에 부흥하고 미래지향적이며 창작활동을 통해 국가발전과 환경개선에 공헌함을 목적으로 합니다. 둘째, 조직적이고 종합적인 창작활동을 통하여 기술발전과 완벽한 토탈디자인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토탈디자인이라함은 여러분야에 부분적인 문제만을 해결하는 것보다 종합적으로 디자인을 해결해야 한다는 개념입니다. 셋째, 기술수준을 국제화하여 국위선양과 세계적인 설계집단으로 도약하자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휴머니즘이 있는 건축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을 위한 공간, 도시, 환경을 만들어야 하며 사용자에게 가장 편리하고 기능적인 아름다운 건축을 만들자는 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보행자와 시민에게 즐거움을 주며 인간친화적, 환경친화적인 건축을 하고자 합니다.
여기서 잠깐 저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제게는 1남 2녀의 자녀가 있습니다. 그 중 제 아들은 건축에 관심을 갖고 또한 소질도 있어서 어려서부터 제게 건축을 공부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아들을 건축가가 아닌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해주신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림건축을 세계적인 설계사무실로 만들겠다고 아들이 고등학교 3학년 때 갑자기 몸이 아파 1년 휴학한 후 심경의 변화를 갖고 연대를 졸업한 후에 미국으로 건너가 목회학과 신학을 10년동안 공부하여 현재는 교회의 목사로서 일하고 있습니다.
저는 항상 아들이 하나님께 겸손하고 교인들한테 섬기는 자세로 임해주기를 기도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제 아들이 목사가 된 것은 저의 어머니의 기도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나의 신앙과 생애에 관해 말씀드리자면 우리 가정은 너무도 많은 축복과 은혜를 받은 가정입니다. 월남하여 자수성가한 집안에서 모두들 명문대를 나와 각자 전문분야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라 생각하며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저의 건축가의 삶을 열어주시고 이 모든 길을 인도하시고 지금도 같이 하시며 미세한 음성으로서 말씀하시는 것을 경청하고자 하며 언제나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살고자 합니다.
물직적인 면, 명예, 사회적 지위 등 제가 가진 것 이상의 것을 주심에 감사하며 이 모든 것은 내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 생각하고 나는 단지 심부름꾼이 되고자 합니다.
내 맘속엔 내가 주인이 아니고 내 삶과 마음을 주제하는 나의 주인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시기에 제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는 제 물질관과 가치관에도 영향을 미쳐 제 모든 것을 사회에 환원하고자 합니다.
이미 50년 전 전쟁터에서 죽었을 목숨을 살려주신 하나님의 뜻이 계실거라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앞으로의 삶도 선한 청지기의 삶을 살고자 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어린이에게 칭찬을 하고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저는 앞으로 육영사업을 하고자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크지 않더라도 작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어린이들의 가치관을 제대로 형성할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다 큰 후엔 이미 늦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그 길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이시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계획대로 그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일이 이루어지게 하거나 이루어지지 않게 것은 모두 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우리는 다만 그분의 계획대로 움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제 신조인 한알의 밀알이 떨어져서 죽지 아니하면 그저 한알의 밀알이나 땅에서 떨어져 죽을때 많은 열매는 맺는다입니다. 죽을 각오로 그 분 말씀에 순종한다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확실을 가지고 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