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월주의는 열등의식의 산물이다”
이수성 새마을운동중앙회 회장 / 전 국무총리
역사란 무엇인가? 서울대 총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이수성 새마을운동중앙회 회장이 지난 2월 17일 오전 7시 롯데호텔에서 열린 인간개발연구원 조찬강연의 들머리에 던졌던 화두이다.
역사의 개념을 묻는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은 수없이 존재하거니와, “아무도 회피할 수 없는 준엄한 심판”이라는 아놀드 토인비의 규정도 그 수많은 답변들 중 하나일 것이다. 이 회장이 소개한 이 규정에 따르면,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 개인과 나라와 민족은 흥왕(興旺)한 반면 그렇지 못한 개인과 나라와 민족은 쇠멸(衰滅)했다. 그렇다면 이 회장이 생각하는, 우리가 결코 회피해선 안 되는 ‘역사의 교훈’은 무엇일까. 그는 두 가지를 거론했다.
“무엇보다 먼저 잘못된 ‘우월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한때 시중에서 왜놈, 떼놈, 양놈이라는 정체 불명의 언어가 쓰여지곤 했는데, 자기 역량에 대한 파악도 없이 세계 정세를 외면한 채 타국을 능멸하는 태도인 우월주의는 사실 ‘또 하나의 열등의식’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망국(亡國)의 거대한 해일이 밀려오기 직전 도리어 쇄국(鎖國)의 빗장을 걸어 잠근 채 ‘경복궁이 세계 제일’이라고 자랑했던 ‘우물안 개구리’식 과오는 너무나 역설적이다. 일본 낭인들이 저지른 명성황후 살해사건도 결국은 허망한 우월주의의 치욕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선조(宣祖) 이후 고질병처럼 뿌리내린 ‘분열주의’도 반드시 우리가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대비의 죽음을 맞아 상복을 6개월 입어야 할지, 3개월 입어야 할지를 두고 당파 싸움을 벌이다가 삭탈관직도 부족해 귀양과 사약까지 난무했던 붕당정치의 폐해는 너무나 크다. 우군(友軍)이 아니면 모두 적군(敵軍)이라는 이 극단적 분열주의가 상해 임시정부와 미주 대한국민회 시절에도 어김없이 재연됐음은 물론이다. 예컨대 LA에 한인교회가 무려 1천5백개나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분열주의가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임을 잘 보여준다.”
한편 이날 강연 말미에 이수성 회장이 박세직 전 안기부장의 질문에 대해 답했던 발언은 청중의 시선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다음은 그의 답변 중에서 인상적인 몇 가지 대목만 정리한 것이다.
(이념갈등과 친북세력에 대해) “우리 두 사람이 서 있었던 지점이 달랐기에 ‘관점’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과거에 북한의 공작금을 받은 세력이 있다고 했는데, 나 역시 보안사에 끌려가 그런 자백을 강요받은 적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교통사고를 위장해 감쪽같이 죽여버리겠다는 위협까지 했다. 서울대 수학과 제자가 보안사 건물 주변에서 익사체로 발견됐는데 발목에 콘크리트 덩어리가 묶여 있기도 했다. 당시 이런 아픈 현실이 엄연히 있었음도 이제는 인정하자.”
(지역갈등의 책임) “가장 큰 책임은 박정희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에게 있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사실 지역갈등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나 이익과는 조금도 관련이 없다. 결국에는 일부 지도자의 정치적 목적 때문에 조장된 신화에 불과하다. 대통령 하나 해먹자고 지역갈등을 조장한 것은 반역사적이고 반민족적인 행위이다.”
(세대갈등의 책임) “대학생들이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서 출발했지만 사회주의 혁명으로 경도된 것은 사실이다. 우리 사회에 사상이 의심스런 자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본다. 그러나 다수의 대학생들에게 그런 시대착오적인 사회주의 사상이 먹히도록 분위기와 조건을 제공한 책임이 정부와 기성세대에게도 일정 정도 있음을 인정하자. 그래야 문제를 풀어갈 수 있다.”
(햇볕정책과 6.15공동선언에 대해) “6.15 남북공동선언이 문제라면 7.4 남북공동성명에도 문제가 있다는 말이 된다. 두 사건 모두 엄격히 보자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국가 이익을 위한 것이므로 용납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것은 몰라도 햇볕정책과 6.15 남북공동선언이 일반 국민들로 하여금 전쟁의 위협과 불안으로부터 해방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해준 것은 커다란 공로라고 할 수 있다.”
이수성 회장은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는 것으로 강연을 마무리했다. 하늘이 이 나라와 민족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일부 지도자의 잘못이 있긴 했지만 대다수 일반 국민은 이 나라를 다정(多情)한 사랑의 민족으로 만들어 왔다. 콜로세움과 검투사, 단두대와 교수형, 아우슈비츠와 홀로코스트, 영국과 미국의 원주민 학살 같은 극단적 비극의 원죄가 없는 우리는 하늘이 벌할 수 없는 민족이다. 황우석 교수와 한류(韓流)는 그런 우리에게 내려준 축복의 선물이다. 총체적 위기 속에서도 결코 희망을 버릴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지환 기자 ssal@ngotime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