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레임덕 현상 빨리 올 수도 있다”
양성철 전 주미 대사
“2005년은 해방 60주년이자 분단 60주년이 되는 해다. 유대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해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40년 동안 광야에서 헤맨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60년 동안 겪었던 고통과 절망이 얼마나 큰 것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제 개성공단에서 생산된 냄비 세트가 롯데백화점에서 절찬리에 판매되는 장면을 뜨거운 마음으로 지켜봤다. 이것은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작지만 큰 변화’가 끊임없이 시도돼 왔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김대중 정부에서 3년 동안 주미대사로 활약했던 양성철 고려대 석좌교수(아래사진)는 지난 12월 16일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인간개발연구원 조찬강연의 말문을 이렇게 열었다. 이날의 강연 주제는 ‘부시 행정부 2기와 한미관계’. 양 전 대사는 “부시 정부의 외교정책이 본질적으로 1기 때의 정책 기조를 지속하겠지만 그 괘도가 수정될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고 전망했다.
“여기에는 몇 가지 변수가 있다. 우선 네오콘 출신의 ‘치킨 호크'(Chicken Hawk)가 여전히 득세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역대 정부와 비교할 때 큰 비율로 각료가 교체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15명 중 9명 교체. 트루먼과 클린턴은 각각 4명과 7명). 재선에 성공함으로써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났다는 부시의 ‘극부(克父) 신드롬’과 이에 따른 심리적 안정감도 빼놓을 수 없다. 모든 정책 결정을 불가피하게 재선과 연계시켰던 1기 때와 달리 ‘역사 속에 어떻게 기록되고, 기억될 것인가’라는 역사의식에 더 큰 신경을 쓰게 된 상황의 변화도 무시할 수 없다.”
양 전 대사는 “시간이 갈수록, 부시 정부의 실정과 실책이 거듭될 경우 레임덕 현상이 의외로 빨리 시작될 수도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부시가 추진하고 있는 반테러 전쟁이 임기 4년 안에 무력으로만 매듭을 지을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는 게 그의 분석이기도 하다.
“부시 2기 정부가 안고 있는 딜레마는 이것만이 아닌데, 무엇보다 먼저 악화될 대로 악화된 국제 여론이다. 시카고 외교관계위원회가 실시한 10개국 여론조사에서 확인됐듯이, 전 세계의 반부시 여론은 하늘을 찌르고 있다.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를 기록하고 있는 재정적자 등 경제적 요인도 부시의 발목을 잡고 있다. 대공황 당시 미국의 재정적자는 GDP 대비 2백60%였으나 2004년 현재 무려 3백%에 육박하고 있다. 이것은 엄청난 국방비 증액에 따른 필연적 귀결인데, 9·11사태 이후 군사예산이 자그마치 50%나 증가했다. 실제로 4천5백억 달러에 이르는 미국의 군사예산은 전 세계 군사비 총액인 9천억 달러의 절반이 넘는다.”
한미관계와 대북정책도 이러한 거시적 차원에서 읽혀져야 한다는 것이 양 전 대사의 입장이다. 그는 “부시 정부의 북한에 대한 인식은 ‘불신’과 ‘혐오’라는 말에 잘 압축돼 있다”면서 “북핵 문제의 유엔 안보리 회부를 전제로 한 6자회담을 고수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미국의 대북 인식을 보여주는 세 가지 징후에 대해 설명했다.
“첫째, 부시 정부는 올 10월에 발효된 북한인권법을 근거로 북한을 압박해 들어갈 것이다. 이를 위해 북한의 인권 문제를 다룰 국제회의에 2백만 달러를 지원하는 등 향후 5년간 2천2백만 달러를 투입할 예정이다. 둘째, 작년 5월에 발족한 PSI(Proliferation Security Initiative)를 가동해 공해상에서 북한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로 의심되는 선박을 자유롭게(?) 나포하는 활동을 강화할 것이다. 셋째, 군사적으로 지하폭파탄(Bunker Busting Bomb) 등 최신예 무기를 개발해 북한에 대한 압력을 가속화시켜 나갈 것이다.”
이러한 대북 강경책은 표면적으로는 북한의 완전한 핵 포기를 목표로 하고 있지만, 부시독트린의 핵심 개념인 ‘김정일 정권 붕괴를 위해서는 선제공격도 불사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음은 물론이다.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한반도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거니와, 이에 대해 양 전 대사는 분명하면서도 단호하게 우리의 입장을 피력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제는 이러한 혼돈의 사태나 위기가 일어났을 때 걷잡을 수 없는 유혈과 파괴와 비극으로 이어지지 않고 평화적이고 안정적으로 상황을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 대안과 대책을 우리가 갖고 있느냐에 있다. 대안도 없이 강경노선만 고집하는 것은 그 저의가 불순할 뿐만 아니라 무책임하다. 21세기의 시대적 변화에 걸맞게 한미동맹을 강화시켜 나가되, 한반도에서는 부시독트린이 우리 국민과 국가수반의 협의와 동의 없이는 절대로 불가하다는 원칙을 분명히 지켜야 한다.”